[목소리들]
“(우리)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논쟁, 셧다운제/청소년 참정권 헌법재판소 판결 등
(2014.03.30 ~ 2014.05.30.)
별다 (청소년활동기상청 활기)
청소년운동 단체들이 발표한 성명, 논평, 기자회견문 등의 입장을 모아서 전합니다. 활동가들이 언론에 발표한 글 등도 전합니다. 일일이 모든 단체들을 찾아보지 못하는 점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청소년운동 메일링으로 온 소식, 제 눈에 띈 것들을 위주로 정리하겠습니다. 혹시 추가되길 바라는 게 있으면 알려주시면 언제든 반영하겠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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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청소년위원회 [논평] (2014.04.08.)
학생징계 중단, 비민주적 행위와 거짓말에 대한 반성부터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논평] (2014.04.13.)
'강력처벌'이 전부가 아니다. 가정에서 청소년 인권 보장부터!
- '아동학대', '청소년에 대한 폭력'을 진심으로 없애길 원한다면 -
최근 잇달아 가정에서 ‘학대’로 인해 청소년(=아동)들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 사람들의 입과 손가락 위를 오르내리고 있다. 언론을 통해 사건이 알려지고 법원에서 관련 사건에 대해 판결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폭력 가해자가 '친모가 아님'에 초점을 맞추고 자극적인 사건 묘사로 내용을 채우는 일부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사람들의 반응 역시 가해자에 대한 빡센 처벌을 요구하는 것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청소년에 대한 폭력/학대’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부모가 유전적으로 50%가 같으냐 같지 않느냐, 폭력의 정도가 어느 정도냐,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몇몇 가해자들이 감옥에 10년을 갇히느냐 20년을 갇히느냐 하는 문제들이 아니다. 그 밑바탕에는 청소년이 신체적·사회적 약자라는 권력관계, 그리고 우리 사회가 전체적으로 청소년에 대한 폭력문제 및 청소년의 인권에 둔감한 현실이 있다. 가정에서 청소년에 대한 폭력을 없애기 위해서는, 가정에서 청소년의 인권을 보장하고 기존의 친권자-청소년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청소년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애들은 잘못하면 맞아야 한다”라고, “사랑의 매가 필요하다”라고, “청소년들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매를 들 수도 있다”라고. 이렇게 청소년에 대한 폭력을 허용하는 것이, 바로 ‘학대’가 아주 쑥쑥 자라날 수 있는 기름진 토양이 된다. 어른이 청소년에게 자신의 뜻을 따르게 하기 위해 ‘팰 수도 있다’는 생각, 그게 바로 청소년의 인권을 무시하고 청소년을 평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동폭력에 대한 유엔 연구(The United Nations Study on Violence against Children: A/61/299)」(2006)는 도입부에서부터 “아동에 대한 폭력이 ‘전통’ 또는 ‘훈육’이라는 명목 하에 성인들로부터 정당화되어 일어나는 것을 중단”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대한민국 사회는 가정에서 청소년의 인권을 보장해야 할 필요성을 잘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신체적 폭력, 사생활이나 진로결정에 대한 억압, 차별, 그밖에 여러 유형으로 가정에서 청소년 인권 침해가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를 ‘인권침해’로도 잘 생각하지 않는다. 청소년 인권은 가정 현관 문 앞에서 이중의 벽 앞에 가로막혀 귀가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는 가정은 사적인 공간이고 사랑으로 아이들을 길러내는 곳이며 함부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는 고정관념이다. 다른 하나는 청소년은 친권자(부모, 보호자, 때로는 어른)에 의해 어느 정도 폭력이나 자의적 간섭을 당해도 되는 존재라는 생각이다. 그래서일까. 친권자의 권리를 폭넓게 보장하는 제도는 여럿 있지만, 가정 안에서 약자인 청소년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법제도는 빈약하기만 하다.
가정에서 청소년에 대한 폭력을 없애는 일은, 청소년도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를 가지며 가정에서도 무효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청소년이 친권자의 소유물이 아니라 평등한 인격체라는 것을 확실히 하자는 것이다.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 평등한 인간임을 밝히고 이에 근거해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아동학대’, ‘청소년에 대한 폭력’ 근절을 위한 첫 걸음으로 가정을 포함하여 모든 곳에서의 체벌 금지를 선언하는 것부터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이미 유엔아동권리위원회도 가정, 학교 및 대안양육기관 등 모든 기관에서 체벌을 금지할 것을 1990년대부터 여러 번에 걸쳐 대한민국 정부에 권고해왔다. 마땅히 해야 할 청소년 인권 보장의 의무를 오랜 시간 방기해온 대한민국 정부야말로, 폭력으로 인해 목숨을 잃거나 상처를 받은 청소년들에 대해 저지른 잘못이 크다.
가정을 바꿔야 한다
청소년에 대한 폭력이 잘 드러나지 않고 반복되는 것은, 청소년의 삶이 친권자에게 달려 있고 청소년이 가정을 떠나게 되면 마땅히 살아갈 방법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동보호기관 등도 개입하다가 가정을 ‘깰까봐’ 두려워하게 되고, 청소년들이 친권자를 떠나서 살아갈 마땅한 길이 없을 때는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 심지어 경찰 등의 국가기관들은 가정에서 폭력 때문에 가출을 단행한 청소년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뿌리부터 해결해야 청소년에 대한 폭력이 일찍부터 발견될 수 있고,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
다행히, 반복되는 사건들과 관련 단체들의 노력으로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제정되어 시행을 앞두고 있다. 이 법은 ‘아동학대’를 폭넓게 정의하고, 친권상실, 임시보호조치 등의 제도를 강화하고 있어서 과거 아동복지법에 비해서 더 적절한 대처가 가능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실질적으로 보호조치를 실행에 옮길 기반과 예산이 부족한 실정이며, 처벌과 사후 대처 부분을 강화했을 뿐 예방적인 접근이라는 면에서는 부족한 점이 있다. 그리고 청소년이 친권자에게만 생활을 의존해야 하는 현실을 바꾸고, 양육 방식 등을 변화시키는 정책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실효성 있게 시행되기 위한 예산과 인프라 확보가 있어야 하며, 이와 함께 더 근본적이고 예방적인 대책도 준비할 필요가 있다.
청소년에 대한 폭력을 막기 위해서는, 비폭력적인 양육 방식을 국가가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친권자들에게 교육해야 한다. 또한 가정에게만 전적으로 양육의 책임을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 사회적으로 함께 양육을 책임져야 하고, 이런 과정을 통해 청소년의 삶을 사회가 함께 책임지고 지원해야 한다. 나아가서는 청소년이 친권자에게만 삶을 의존하는 선택지 외에도 다른 방식으로도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가정·가족은 신성불가침의 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지고 변화하는 하나의 제도이다. 우리 사회가 가정을 어떻게 변화시키느냐에 따라 가정에서 청소년의 인권 현실 역시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4월 13일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성명] (2014.04.16.)
서울시교육청은 학생 통제 스마트폰 앱 ‘아이스마트키퍼’ 보급을 철회하라!
서울시교육청은 지난 2013년 2학기부터 ‘아이스마트키퍼’라는 스마트폰 앱을 일선 학교에 보급하기 위해 서울시내 11개 학교에서 시범 운용을 시작하였다. 아이스마트키퍼는 학교나 가정에서 청소년들의 스마트폰 사용을 규제하고, 청소년들의 스마트폰 중독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만들어진 앱이다. 서울시교육청은 아이스마트키퍼 시범운영을 2014년 2월에 끝마치고 4월부터 확대 보급할 예정이다.
우리는 아이스마트키퍼에 대한 소식을 처음 접하고 난 후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는, 아이스마트키퍼는 앱 자체가 학생에 대한 통제와 인권침해로 얼룩져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이런 앱을 서울시교육청 차원에서 서울시 각 학교에 보급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학교에서 아이스마트키퍼를 시행하면, 학교는 아이스마트키퍼를 설치한 학생들의 스마트폰 사용을 원격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아이스마트키퍼의 심각한 인권침해에 대해 학생들의 여론이 뜨겁게 달궈지고 있다. 인터넷 이곳저곳에서 아이스마트키퍼에 대한 불만과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아이스마트키퍼에 대한 각종 루머가 난무하고, 심지어는 아이스마트키퍼를 무력화하는 앱이 등장했다. 이는 학생 대다수가 아이스마트키퍼의 인권침해성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울시교육청은 언제까지 학생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정책을 펼 것인가.
실효성도 없고 접근 방식도 잘못된 정책, 아이스마트키퍼
서울시교육청은 이 학생 통제 앱 정책을 시행하는 근거로 ‘학생들의 스마트폰 중독 예방’을 들고 있다. 하지만 이는 학생들의 스마트폰을 학교의 입맛대로 통제하겠다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발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청소년의 스마트폰 중독 실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스마트폰 중독과 그 문제에 대한 뚜렷한 정의조차 내려지지 않은 상태이다. 설령 일부 학생들에게 스마트폰 중독 위험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학생에 대한 전문적인 접근과 치료가 필요한 문제이지 학생들의 스마트폰을 일괄 통제해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스마트폰 중독 예방을 위해 아이스마트키퍼 앱을 일괄 설치하는 것은 지나치게 막연하고 광범위한 규제이다.
통제 정책의 또 다른 근거로는 '스마트폰 생활지도’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 있다. 수업시간 중 스마트폰 사용을 통제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통제적인 방식은 아무런 명분이 없다. 휴대폰 사용은 교사가 권위로 강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박물관에서 자신의 설명을 듣지 않고 휴대폰을 만지는 방문객들에게 제재를 가하는 안내원을 상상하기는 힘들다. 방문객에게 자신의 설명을 듣도록 강제하는 것이 ‘생활지도’가 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수업 또한 듣도록 강제할 수 없다. 1교시 내내 수업에 쉼 없이 집중하기를 강요하는 지금의 수업방식은 그저 학교에 녹아있는 폭력성과 교사의 권위주의를 드러낼 뿐이다.
또한 정작 학생들의 스마트폰 사용을 통제한다고 학생들의 수업 참여도가 올라가지는 않는다. 손발을 묶거나 눈에 물파스를 발라 졸음을 가게 하더라도 학생의 자발성이 없다면 수업 참여는 불가능하다.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 원인은 학생들을 끊임없이 낙오시키고 줄 세워야 하는 입시 위주의 교육과 열악한 교육 여건, 학생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 학교 구조 등 스마트폰이 아니라 다른 데에 있다. 이런 문제들은 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끊임없이 통제한다고 덮어질 문제가 아니다.
현행 법률 및 조례와도 충돌하는 아이스마트키퍼
아이스마트키퍼는 현행 법률 및 조례와도 충돌한다. 첫째로는 현재 시행되고 있는 서울시 학생인권조례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서울학생인권조례 제13조(사생활의 자유)에는 ‘학생은 사생활의 자유와 비밀이 침해되거나 감시받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아이스마트키퍼는 통신의 자유를 비롯한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 또한 같은 조 4항에 의하면 ‘학생이 제·개정에 참여한’ 학칙을 근거로 하지 않는 이상, 학교는 휴대전화의 사용 자체를 금지할 수 없다. 그러나 서울시교육청은 아이스마트키퍼를 보급해서 학교가 아무런 근거와 절차 없이 마음대로 학생의 스마트폰을 통제할 수 있도록 방조하고 있다. 이는 분명한 서울학생인권조례 위반이다.
또한, 아이스마트키퍼는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할 소지도 있다. 통신비밀보호법 제3조(통신 및 대화비밀의 보호) 1항에 의하면, 통신비밀보호법 또는 형사소송법, 군사법원법에 근거하지 않고서는 당사자의 동의 없이 통신을 방해할 수 없다. 하지만 아이스마트키퍼는 통화를 방해하고 차단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그래서 서울시교육청과 아이스마트키퍼 개발사(넷큐브테크놀로지) 측은 아이스마트키퍼 설치가 당사자의 동의하에서만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이스마트키퍼를 시범 운영한 학교 다수가 학생 당사자의 실질적인 동의를 받지 않았다. 심지어, 서울시교육청의 아이스마트키퍼 동의 가정통신문 예시도 학생의 동의 여부를 묻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아이스마트키퍼가 당사자의 동의하에 시행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학생 스마트폰 통제의 본질
학생 스마트폰 통제의 핵심은 학생들이 ‘공부’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일방적인 요구를 드러내는 것이다. ‘중독’이라는 단어는 학생들의 스마트폰 사용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면서, 스마트폰을 멀리하는 성실한 학생과 스마트폰에 빠진 나태한 학생을 대비시킨다. 이는 학생의 스마트폰 사용에 ‘중독’이라는 굴레를 씌우면서 문화·여가·취미생활을 즐기는 학생들을 몰아세우고 압박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이스마트키퍼 역시 학생들의 휴식권과 정보인권,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하는 ‘핸드폰 통제 정책’의 일부이다.
서울시교육청은 학생 통제로 점철된 아이스마트키퍼 보급 계획을 당장 철회하라. 아수나로 서울지역모임은 서울시교육청의 학생통제앱 아이스마트키퍼 정책을 철회시키기 위해 행동할 것이다. 그리고 ‘학생통제앱 아이스마트키퍼 퇴치 서명운동’을 비롯한 청소년들의 행동을 이끌어낼 것이다.
2014년 4월 16일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서울지역모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성명] (2014.04.21.)
진주외고 사건은 왜곡된 학교교육의 폭력이 낳은 죽음이다.
진주외국어고등학교에서 동급생 간 폭행으로 학생 1명이 사망한 지 11일만에 선·후배간 폭행으로 또다시 학생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이 일파만파 커지자 교육당국은 특별감사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학교폭력(정확하게는 학생간 폭력) 문제는 단순히 학생과 학생 사이의 폭력문제로 국한하여 다뤄져서는 안된다. 학생간 폭력은 현상일 뿐이며 그 근본원인에 주목해야 한다. 이번 사건은 학교라는 공간이 가진 폭력성이 드러난 사건이다. 현재 학교는 학교당국과 교사가 만들어놓은 수많은 차별과 통제, 그리고 갈등과 억압이 넘쳐나는 폭력적인 공간이다. 교사가 학생에게 행하는 일상화된 차별과 폭행, 폭언, 그리고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폭력적인 학교 문화는 공동체 구성원 내의 다양한 갈등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데 익숙하게 만든다. 이것이 학내폭력 추방 캠페인만으로 학교 내 폭력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다. 특히 이번 사건이 일어난 진주외고의 경우 법으로 금지한 폭력적 체벌이 '교육벌(교사가 학생 훈육의 목적을 가지고 학생에게 일정한 신체적 고통을 주는 행위를 말한다)'이라는 이름으로 생활규칙에 버젓이 명시되어 있는 등 학생인권이 전혀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폭력이 ‘벌’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 환경이라는 점에서 이번 참사는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번 사건과 같이 비극적인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가장 우선적으로 학교 공동체 내에서 서로간의 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폭력에 노출된 경험은 개인의 폭력성에 악영향을 미친다. 체벌이든, 폭언이든, 왕따든 폭력이 인정되고 용납되는 분위기는 끊임없이 폭력 문제를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문제가 발생한 진주외고에 시급히 전체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인권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또한 경남교육청이 반대해서 부결되었던 학생인권조례를 지금이라도 당장 제정해야 한다.
다음으로 교사와 학생 사이에, 선배와 후배 사이에, 학생과 학생 사이에 위계질서와 차별이 사라져야 이로 인해 등장하는 폭력의 문제도 해결될 수 있다. 입시와 경쟁, 학생들을 서열화시키는 교육방식은 또다른 차별과 배제, 폭력을 양산하는 중요한 고리이다. 학교가 학생들을 줄세우고, 배제시키는 교육이 아니라 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교육의 주체로서 존중받고, 교육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참여할 수 있으며,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는 공간으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구성원 간의 차별과 권위적 위계를 없애야 학교 폭력 문제는 줄어들 수 있다.
교육당국은 진주외고 사건에 대해 특별감사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항상 이런 문제들이 벌어지면 교육당국에 감사를 청구하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고, 학교폭력을 막는 매뉴얼을 만들어 시행할 것을 제기한다.
하지만 진주외국어고등학교가 지난해 학교폭력 우수사례 공모전에서 장관상을 받은 것이라든지, 2013년 학교폭력 피해자가 한 명도 없는 학교로 나타났다는 점은 평소 교육당국의 허술하고 무능한 교육행정을 반영한다. 학교폭력의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보여주기식 감사, 형식적 매뉴얼 시행, 그리고 가해자에 대한 징계와 처벌을 하는 해결방식은 대단히 일회성이 짙은 방안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감시감독 해야할 경남도교육청의 문제도 있다. 진주외고에서 교장까지 지냈던 고영진이 교육감으로 있는 경남도교육청의 경우 사건을 은폐 축소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또한 이 문제의 핵심 당사자인 진주외고 이사장은 학생이 사망한 다음날에도 남편인 고영진 경남교육감의 선거운동을 위해 행사장에 나갔다고 한다. 학생의 죽음보다 개인의 입신양명이 더 중요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학교법인을 통해 권력을 누려왔던 이사장은 책임을 진다는 말 한마디로 아름답게 사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치열한 경쟁교육과 반인권적인 학교 실태에서 신음하고 죽어가는 학생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동안 사회가 보여준 폭력을 답습하거나 자신의 몸을 벼랑 끝에 던지는 일밖에 없다.
진주외국어고등학교의 사건은 단순히 진주에 있는 한 학교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 교육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시사하는 바가 큰 사건이다. 학교폭력 문제에 있어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학교가 학생에게 가한 여러 가지 폭력으로 인해 내재되어 있는 학생들의 분노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학교폭력 문제가 드러나면 표면적인 폭력만 대두될 뿐, 학교가 학생에게 가하는 야간 강제야간 자율학습이나 1등부터 꼴찌가지 만드는 상대평가로 이루어지는 차별교육에 대해서는 언론과 교육당국은 무신경하고 오히려 대단히 뻔뻔할 정도로 침묵한다. 진주외고에서 벌어진 가슴아픈 사건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라도 현재 대한민국의 교육과 학교에 대해 진지하고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특히 학력 향상을 최고의 기치로 부르짖으며 자율형 사립고 확대, 2014년 고입 연합고사 부활 등 학생들을 경쟁교육으로 내몰면서도 경남학생인권조례는 무산시킨 경상남도 교육청과 고영진교육감은 이번 사건에 책임감을 가지고 임기응변이 아닌 제대로 된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설 것을 촉구한다.
2014년 4월 16일
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 창원지부
인권친화적학교+너머운동본부 [성명] (2014.04.24.)
학생들을 죽인 것은 학교가 아닌가! 우리에게 인권친화적 학교를!
- 진주외국어고등학교 사망 사건 재발방지를 촉구하며
지난달 경남 진주의 진주외국어고등학교에서 비극적인 학생 사망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3월 31일의 첫 번째 사망 사건은 1학년 학생이 다른 1학년 학생을 폭행하여 일어났으며, 4월 11일에 일어난 두 번째 사망 사건은 기숙사 자치위원인 2학년 학생이 1학년 학생을 '체벌'하는 중 일어났다. 돌아가신 학생 분들께 애도와 조의를 표한다.
우리 단체들은 비극적 사고 앞에서 참담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있다. 또한 첫 번째로 불행한 사고가 났을 때 학교가 적절한 조치를 전혀 취하지 않았다는 소식이 속속 전해져 더욱 큰 분노를 느낀다. 우리는 이러한 비극적 사건들이 폭력과 인권침해가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린 학교의 현실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인권친화적인 학교 문화와 학교 구조를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두 번째 사건은 '자치회' 학생들에게 사감의 승인 하에 다른 학생들을 통제하고 처벌할 수 있도록 한 기숙사 학교의 운영 방식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첫 번째 사건 역시 분명한 전후 관계가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학생들이 하루 종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 상황으로부터 직간접적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더구나 '규율'과 '자치회'라는 이름으로 공공연하게 학생간 폭력을 묵인, 방조하여 학생이 죽음에까지 이른 이번 진주외고 사태는 기숙사를 운영하는 모든 학교에서 자행되는 빙산의 일각은 아닌지 철저히 점검해야 할 것이다.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 기숙사내 일사불란한 질서를 위해서는 폭력마저 참아내야 한다는 것은 절대로 용인될 수 없다. 기숙사 학교들은 학생들의 생활 전반을 자의적으로 규제하는 생활규정들과 벌점제 등을 두고 있는 경우들이 많다. 심야까지 입시공부를 시키거나 선후배간 위계질서를 만드는 등의 폐단도 드물지 않다. 2008년에 학생들이 학내 시위를 하고 세상에 그 열악한 인권 상황을 알렸던 경기도 광명의 모고등학교 역시 그런 경우였다. 우리는 교육부와 교육청들이 기숙사 학교들의 실태에 대해 기숙사 생활 부분까지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점검하고, 인권의 관점과 기준을 가지고 교육 환경과 생활 규정 등을 개정하도록 조치할 것을 요구한다.
올해 초에 순천에서의 사망사건 등, 폭력에 의해 학생들이 희생되는 일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는 정부의 소위 '학교폭력 대책'과 말뿐인 '체벌금지' 정책의 구멍을 드러내고 있다. 정부는 체벌금지를 제대로 알리고 이를 정착시키기 위한 노력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 '학교폭력 대책'으로는 형식적인 학교폭력 전수조사와 몇몇 대책들이 '전시'되고 있을 뿐이다. 학교가 폭력과 인권침해를 반복하여 재생산하고 있는 이상, 우리는 진주외고의 연이은 사망 사건, 또는 이와 비슷한 사건들 앞에서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다. "학생을 죽인 것은 바로 학교인 것은 아닌가? 이런 학교의 현실 자체가 학대이고 살인인 것은 아닌가?" 진주외고에서 폭력과 죽음이 반복될 때, 정부는, 국가는, 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묻고 싶다. 학생들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의무를 과연 다하고 있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실질적이고 더 철저한 체벌금지 조치부터 시작하여, 인권친화적인 학교를 만들기 위한 종합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청소년․학생인권 보장을 위한 법률의 입법과 정부의 적극적인 의지가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찾아서 가야 할 길은 인권과 민주주의가 꽃피는 교육, 사람이 살아 있는 교육이다.
2014년 4월 24일
인권친화적 학교+너머 운동본부
강원교육연대/ 건강세상네트워크/ 경기학생인권실현을위한네트워크/ 경북교육연대/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관악동작학교운영위원협의회/ 광주교사실천연대 ‘활’/ 광주노동자교육센터/ 광주비정규직센터/ 광주여성노동자회/ 광주인권운동센터/ 광주인권회의/ 광주청소년인권교육연구회/ 광주청소년회복센터/ 광주YMCA/ 교육공공성실현을위한울산교육연대/ 교육공동체 나다/ 국제앰네스티대학생네트워크/ 군인권센터/ 노동자연대 다함께/ 녹색당+/ 대안교육연대/ 대한민국청소년의회/ 대한성공회정의평화사제단/ 동성애자인권연대/ 무지개행동 이반스쿨팀/ 문화연대/ 민주노총서울본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주의법학연구회/ 불교인권위원회/ 서울교육희망네트워크/ 서울장애인교육권연대/ 서초강남교육혁신연대/ 시민모임 즐거운교육 상상/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양평교육희망네트워크/ 어린이책시민연대/ 원불교인권위원회/ 인권교육센터 들/ 인권법률공동체 두런두런/ 인권운동사랑방/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국공무원노동조합서울지역본부/ 전국지역아동센터협의회 부설 한국아동청소년인권센터/ 전북평화와인권연대/ 종교자유정책연구원/ 진보교육연구소/ 진보신당연대회의 청소년위원회/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청소년다함께/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충북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본부/ 통합진보당서울시당/ 평등교육실현을위한전국학부모회/ 학교급식전국네트워크/ 학벌없는사회/ 학생인권을위한인천시민연대/ 학생인권조례제정경남본부/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한국성폭력상담소/ 흥사단교육운동본부/ 희망의우리학교/ 21세기청소년공동체 희망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논평] (2014.04.25.)
헌법재판소의 '청소년 온라인게임 셧다운제' 합헌판결 매우 유감스럽다.
'청소년 온라인 게임 셧다운제'가 2014년 4월 24일, 합헌의견 7명에 위헌 의견 2명으로 헌법재판소의 합헌 판결을 받았다.
셧다운제는 2011년 11월 시행되어 청소년의 온라인게임 과몰입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청소년들의 문화적 권리를 규제해왔다.
우리는 셧다운제의 불합리함을 알리고 셧다운제 폐지를 위해 투쟁해온 입장에서 이번 판결에 매우 큰 유감을 표명한다.
셧
다운제는 청소년의 문화적 권리 나아가 청소년의 인권을, '보호'를 내세워 언제든 규제할 수 있다는 권위주의적 편견의 결과물이다.
이번 판결은 이러한 편견이 일부 부처나 관료들뿐만이 아닌 사법부를 비롯하여 이 사회 전반에 퍼져있음을 새삼스레 다시 한 번
확인해준 셈이다.
셧다운제 조항에 합헌 의견을 제시한 재판관들은 "인터넷 게임 자체는 오락 및 여가활동의 일종으로
부정적으로 볼 수 없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16세 미만 청소년에 한하여 게임을 규제하는 것이 과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게임 과몰입 등으로 문제를 겪는 사람들의 연령대는 다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재는 오직 청소년의
인권만은 더 쉽게 규제해도 된다는 전형적인 청소년 억압 정당화 논리의 편을 든 것이다.
셧다운제를 비롯하여 이러한
논리에서 나온 규제들이 청소년이 스스로 삶의 방식을 선택할 자유를 규제하고 다수 청소년들의 권리를 광범위하게 침해하는 것이다.
이는 헌법재판소의 반인권적인 실망스런 판결에도 변함없는 문제이다. 아수나로는 셧다운제 폐지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청소년의 쉬고 놀
권리, 문화적 권리를 위해 투쟁을 이어나갈 것이다.
2014년 4월 25일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성명] (2014.04.30.)
청소년에게는 과연 민주주의가 있는가
- 헌법재판소의 청소년 참정권 침해 제도 합헌 판결 앞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선거'를 가리켜 민주주의의 꽃이자 뿌리라고들 한다. 그러나 이 모든 말이 청소년들에게는 다른 나라 이야기다. 청소년들은 선거권도 피선거권도 없다. 선거운동도 금지당하며 이에 따라 선거에 관련된 표현의 자유를 박탈당한다. 정당에 가입할 자격조차 부정당한다. 학생인권조례를 만들 때에도, 무상급식이 논란이 될 때에도, 청소년들은 주민발의 서명 하나, 주민투표 하나 하지 못했다. 선거에 대해 어떠한 발언도 참여도 할 수 없다. 이런데도 이 땅의 청소년에게 과연 민주주의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여기에 더해 2014년 4월 24일, 헌법재판소는 청소년들이 민주주의의 예외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판결을 내놓았다. 청소년들이 "정치적 판단능력이 미약"하고, "정신적·신체적 자율성이 불충분"하기 때문에 선거권/피선거권뿐만 아니라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도 침해하는 법률들이 죄다 합헌이라고 판결한 것이다. 이 판결은 헌법재판소가 ‘청소년 온라인게임 셧다운제’가 합헌이라고 판결한 같은 날에 함께 나온 것이어서 더욱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청소년 참정권 박탈은 명백한 인권침해
헌법과 국제인권조약은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리고 당연히 청소년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그러나 공직선거법은 청소년의 선거운동을 금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청소년들은 선거를 앞두고 어떤 후보가 당선되기를 바라며 지지의 뜻을 밝힐 수도, 낙선하기를 바라며 반대의 뜻을 밝힐 수도 없다. 후보나 정당의 정책을 비교하고 평가하여 발표할 수도 없다. 자신에게 좋은 정책을 내건 후보를 칭찬하거나 알릴 수도 없고, 자신에게 나쁜 정책을 내건 후보를 욕하거나 비판할 수도 없다. 이것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침해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헌법과 국제인권조약은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리고 당연히 청소년에게도 결사의 자유가 있다고. 특히 정당의 자유는 우리 헌법에 특별히 더 명시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정당법은 정당 당원 및 발기인이 될 자격을 '국회의원 선거권이 있는 자'로만 제한하면서 청소년들의 정당의 자유를 완전 부정하고 있다. 청소년은 자신의 생각과 뜻에 맞는 정당에 참여할 수도 없다. 청소년은 정당에 가입하여 자신의 의사에 따라 정치활동을 할 수도 없다. 이것이 결사의 자유와 정당의 자유에 대한 침해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헌법과 국제인권조약은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참정권이 있다고. 청소년에게도 본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에 대해 의견을 표현하고, 그 의견을 적절하게 반영하도록 할 권리가 있다고. 청소년은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에 대해 의견을 말하고 참여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그러나 공직선거법과 지방자치법, 주민투표법 등은 이를 거부한다. 청소년들은 선거에도, 주민발의나 주민투표에도 전혀 참여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 밖의 방법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청소년의 참정권은 법적으로 거의 보장되지 않고 있다. 그 근거라고는 고작 애매모호한 '성숙', '미성숙' 구별밖에 없다.
헌법재판소의 이번 판결은 이런 명백한 인권침해가 모두 괜찮다고 해버린 것이다. 이 사안에서 헌법재판소는 기본권을 지키는 국가기구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않았고 기존 편견과 제도의 정당성을 변명해주기에 급급했다. 특히 헌법재판소가 판결을 3년이나 끌다가 이제 와서 다음 선거 때는 청구인들이 만19세를 넘으므로 각하한다는 부분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위헌확인소송을 제기한 2012년에 바로 심의를 해야 했을 것을 뒤늦게 판결해놓고서, 이제 나이를 먹어서 구제할 권리가 없다는 논리 앞에서는 할 말을 잃게 된다. 마치 사람을 구해달라고 했더니 죽을 때까지 질질 끌다가 이미 죽어버려서 구할 수가 없다고 손을 놓는 뻔뻔한 태도와 무엇이 다른가. 소수의견조차도 표현의 자유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인정하거나 청소년의 참정권 보장을 위한 입법을 권고하기보다는 상당 부분 '대충 18세 정도면 성숙한 거 같으니까…'의 논리를 취했으니, 말 다했다.
청소년에게 민주주의를!
국회는 청소년에 대한 편견에 차서 법을 만들었다. 이 역시 청소년들의 의견은 안중에도 없었다. 헌법재판소는 이것이 합헌이라고 판결했다. 그 앞에서 유엔아동권리협약과 헌법 등이 선언한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정당의 자유, 참정권 등은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 되어버렸다.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민주주의는 그저 듣기 좋은 환상일 뿐 청소년들의 현실이 되지 못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살고 있는 현실은 여전히 민주화가 덜 된 독재의 현실과 다름없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이런 실망스러운 판결에도, 우리는 단지 실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제 할 일을 다하지 않는 국가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 길을 만들어야 한다. 어차피 우리 사회가 일구어온 민주주의도 재판장에서 법관들에 의해 이루어져 온 것은 아니었지 않나. 우리는 민주주의를 청소년들의 현실로 만들기 위해, 청소년들의 보편적 권리로서의 참정권을 보장받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할 것이다. 헌법재판관이든, 국회의원이든, 이 사회의 어떤 사람이든,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한다.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이며 청소년도 거기에서 예외가 아니라면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라. 민주주의는 나이 먹음에 따라 주어지는 생일 선물도, 성숙에 따라 주어지는 자격증도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는 반쪽짜리 그들만의 민주주의일 뿐이다. 나이가 적다는 이유로 보편적 권리를 박탈할 권리가, 당신들에게는 없다. 그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도 그것은 단지 인권침해이고 차별이고 독재일 뿐이다. 청소년에게 모든 인권을. 우리에게 진정한 민주주의를!
2014년 4월 30일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1618선거권을 위한 시민연대 [선언문] (2014.05.13.)
가만히 있지 않으려는 작은 발걸음,청소년의 정치적 권리를 선언한다!
우리 삶의 모든 일은 정치와 연관되어있다. 그것은 어리다고, 학생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학교의 책상과 의자부터 입시제도 까지, 모든 일이 정치였다. 하지만 어른들은 우리에게 정치는 ‘더러운 것’이라며
정치를 그들만의 전유물로 남겨놓았다.
학생·청소년은 교육정책의 가장 직접적 당사자임에도 교육감을 뽑을 수 없고, 시민임에도 시장을 뽑을 수 없다. 입시제도의 변화도, 동네의 변화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존재, 그리고 이제는 차가운 바다 한가운데에서 사라져가는 뱃머리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가라앉는 배를 바라보며,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와 그 유가족을 바라보며, 누군가의 생사를 결정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정치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더 이상은 지켜보기만 할 수도, ‘가만히’ 있을 수도 없다.
행동하고, 움직이고,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책임지지 않는다. 여당 의원은 울부짖는 실종자 학부모의 사진에 ‘선동꾼’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이것이 현 정부의 모습이다.
이런 상황을 바라보며, 다가오는 6·4지방선거에서도 ‘가만히’있을 수는 없었다. 누구에게 권한을 주고 책임을 물을지 9일간의
청소년 투표를 통해 청소년도 직접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제1회 6·4 지방선거
청소년투표>가 시작함을 알림과 함께,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를 선언한다.
1618 선거권을 위한 시민연대
2014년 5월 13일 (추정)
광주지역 인권회의 [논평] (2014.05.16.)
5월13일(어제), 양형일 교육감 예비후보(이하 양형일 후보)는 광주학생인권조례 제정 이후 광주에서 교권침해사례가 급증했다고 주장하는 내용의 입장을 밝혔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양형일 후보는 국감자료를 근거로 들어 교권침해사례는 2010년 19건, 2011년 209건, 2012년 487건으로 급증했고 학생인권조례에 이어 제정된 교권조례가 교권침해를 막는데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마치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교권이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주장했다.
이는 명백한 ‘학생인권조례 흔들기’이며, 교육공동체와 시민들의 요구에 근거해 제정된 학생인권조례를 무력화하려는 시도이다. 양형일 후보 측이 내세운 교권침해사례 수치만으로 학생인권조례 제정 후 교권침해사례가 늘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통계 해석에 대한 무지이거나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것이다.
우선, 2011년부터 교권침해사례 접수가 급증한 것은 교권조례가 제정되면서 교육청에 이에 대한 상담 및 접수기능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교권침해가 급증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파악되지 못했던 사례가 구체적으로 확인된 결과인 것이다. 이는 학생인권침해사례도 마찬가지다. 광주시교육청 민주인권교육센터에 따르면 2011년부터 학생인권침해 상담 및 구제사례가 연간 수백 건에 이른다고 하는데, 양형일 후보의 논리에 따르면 교권조례의 제정 이후 학생인권침해사례가 급증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옳지 않으며, 그동안 문제로 여기지 않던 부분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통계상 수치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또한, 양형일 후보의 지적은 교권침해의 주범이 교육부, 교육청, 학교 관리자 등 교육당국이라는 지적도 간과하고 있다. 2010년 참교육연구소가 전국의 교사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설문조사에는 ‘누구로부터 교권침해를 받는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부분의 교사들이 교과부와 교육청, 학교 관리자를 꼽았다.<표 참조> 이러한 조사결과를 무시한 채 교권침해가 학생인권조례 때문이라는 양형일 후보의 주장은 어불성설이며, 광주의 교육수장을 꿈꾸는 사람으로서 교권침해의 책임을 전가하려는 무책임한 태도이다.
<표> 누구로부터 교권침해를 받는다고 생각하는지? (교사)
매우 그렇다 | 그렇다 | 그렇지 않은 편 | 전혀 그렇지 않다 | |
교육과학 기술부 | 52.5% | 34.6% | 12.0% | 0.9% |
교육청 | 40.2% | 43.3% | 15.6% | 0.9% |
학교관리자 | 36.7% | 40.5% | 20.7% | 2.1% |
학부모 | 18.4% | 43.8% | 33.4% | 2.2% |
학생 | 10.2% | 29.6% | 44.1% | 16.0% |
<2010년 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서울본부가 참교육연구소에 의뢰해 전국에 있는 교사 1,478명에 대한 온라인조사>
아울러, 학생인권에 대한 존중이 오히려 교권존중으로 나타나고 있는 사례도 무시하고 있다. 학생과 교사 간 수평적 관계에서 자율과 책임, 학생자치 등 학생인권조례의 정신이 발현되고 있는 이른바 ‘혁신학교’에서는 교권침해사례도 상대적으로 낮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혁신학교에서 생활하고 있는 교사들의 다수는 인권친화적인 생활교육이 학생과 교사 간의 소모적인 갈등을 줄이고 소통과 존중이 있는 학교문화를 만들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이러한 사실들을 외면한 채 교권과 학생인권이 대립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심각한 왜곡이다.
우리는 교권침해가 학생인권조례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양형일 후보의 진정한 속내가 무엇인지 몹시 궁금하다. 혹시 교권에 대한 왜곡된 관심을 앞세워 교사들의 표심을 자극해보려는 비겁한 의도가 숨겨져 있지는 않은지 묻고 싶다. 만약 그렇다면 이 또한 광주의 교사들을 우롱하는 처사이다. 우리는 광주의 교사들이 그런 왜곡된 조작과 학생인권조례 흠집 내기에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양형일 후보가 진정으로 광주의 교육수장을 꿈꾼다면 학생인권조례를 흔들어 표심이나 자극하는 행태를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그보다는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학교의 문화를 학생과 교사가 서로 존중하고 소통하는 문화로 어떻게 바꿀 것인지를 숙고해야 한다. 그리고 진정으로 교권이 존중되기를 바란다면 오히려 학생인권조례를 학교현장에 어떻게 안착시킬 것인지, 그리고 교육부, 교육청, 학교관리자들에 의한 교권침해를 어떻게 막을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학생인권조례에 ‘딴지’를 건다고 교권이 보호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2014년 5월 14일
광주참교육학부모회, 청소년인권행동아수나로광주지부, 광주학벌없는사회시민모임, 광주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광주인권운동센터, 복지공감+, 광주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실로암사람들
청소년유니온 [기자회견문] (2014.05.20.)
대한민국 청소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청소년의 안전한 교육환경 보장하라
-청소년유니온 6.4 지방선거 정책요구안을 발표하며
4월 16일, 우리 모두를 절망으로 빠뜨린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고, 살아남은 이들도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큰 고통을 겪고 있다. 이 참사는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우리 사회의 비인간적인 단면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으며, 청소년은 이를 보면서 우리 사회의 무책임에 실망했고, 과연 이 국가가 우리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을지 불안해하고 있다.
이 사건 이후, 모든 이들이 미안하다고 한다. 너희를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 나쁜 정치를 만들어서 미안하다, 이런 사회를 너희들에게 물려줘서 미안하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아직도 사람보다 돈을 더 중요시 하는 사회 시스템이 유지되고 있으며, 국가는 여전히 시민들의 목소리를 막으며 우리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과연 당신들이 우리들의 생명과 안전, 삶과 행복에 대해 진정으로 고민한 적이 있는지 우리 사회와 정치에 묻고자 한다.
단지 세월호만의 얘기가 아니다. 어떤 청소년은 지금도 현장실습 산업 현장에서 교육이란 이름하에 제대로 된 노동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으며, 또 다른 청소년은 자신의 권리에 대해서 제대로 된 교육을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채 노동의 현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우리는 이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잘못된 사회 시스템에 방치되고 고통 받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우리가 선택하지도 않은 세상 때문에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일이 없을 때까지 우리는 청소년의 사회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이에 우리는 6.4 지방선거에 출마한 교육감 후보들에게 안전한 현장실습과 노동인권교육의 확대를 위한 정책들을 제안한다. 사회 시스템에 희생당하고 있는 청소년들이 더 이상 이런 비극적인 일들을 겪지 않도록 이 정책들에 응답하기를 요구한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우리가 살아갈 세상을 선택할 권리가 있음을 선언한다. 우리는 경제적 효율성만을 중시하는 세상 대신, 안전한 교육환경에서 살 수 있는 세상을 선택할 것이다.
2014. 5. 20
청소년유니온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성명] (2014.05.25.)
체벌금지 4년. 하지만 끊이지 않는 폭력
-경기도 수원에서의 체벌사건에 대하여
5월 20일 경기도 수원의 모 고등학교에서 38명 한 반 전체가 담임교사에게 청소상태 불량을 이유로 뺨을 맞는 사건이 있었다. 이날 오전 8시 이 교사는 학생들에게 도서관과 교실을 청소하라고 지시한 후 8시 20분 ‘청소 상태가 불량하다’는 이유로 반 학생 38명을 한 사람씩 불러 뺨을 때렸다. 피해학생의 학부모가 도교육청에 민원을 제기한 상태이며 해당 교사는 최근에도 자주 학생들의 뺨을 때린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학교측은 학생인권조례에 어긋나니 경고 처분을 할 예정이라는 매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이 사건이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체벌사건은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올해 초 순천에서는 체벌로 학생이 사망하는 등 체벌은 아직도 전국 각지에서 자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2010년 체벌을 금지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고, 2011년에는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에 제 18조 1항 체벌금지 조항이 추가됨에 따라 한국의 법령들은 명시적으로 학생에 대한 체벌을 금지해왔다. UN아동인권위원회, UN고문방지위원회에서도 한국에서의 체벌행태를 수차례 비판한바 있다. 무엇보다 한국의 청소년들은 대한민국의 시민이며 대한민국 헌법은 신체의 자유를 보장하고 고문을 금지하고 있다. 학교 교사들의 체벌은 조례위반, 시행령 위반이며 반헌법적이고 인류사회가 인정하는 보편적 인권에도 어긋나는 매우 중대한 범죄이다.
이번 체벌사건을 일으킨 교사는 ‘자신이 감정적으로 때린 것이 아니며 학생들을 지도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고 청소활동에 대한 책임감을 키워주기 위해 자극을 준 것’이라는 해명을 했다. 그러나 애초에 청소지도라는 것이 학생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 교사의 생각이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비민주적 행태 이다. 또한 감정적으로 때리지 않았다는 말은 해당 교사가 그 당시 이성적이었다는 것인데, 이성적으로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결국 해당교사의 일상에 폭력이 자주 수반됨을 드러내고 있다. 아무리 교사가 책임감을 심어주기 위한 선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헌법이 보장 하는 권리들을 마음대로 침해하며 시민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 근본적으로 청소년을 평등한 시민이라는 인식이 없이 그저 지도해야 하는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태도에서 폭력은 시작되고 있다.
해당교사의 실제 폭력과 더불어 해명에서 드러난 비민주성, 폭력성은 결코 경고처분으로 가볍게 넘길만한 일이 아니다. 명백히 법을 어기고 있으며 한국 교육이 가르치고 있는 인권에도 어긋나는 중대한 폭력이다. 이것은 이번 사건뿐만 아니라 전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모든 체벌에도 해당된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경기도 교육청과 학교가 해당교사에게 중징계를 내릴 것을 촉구한다. 아울러 교육부와 전국의 교육청들도 체벌 근절에 나설 것을 요구한다.
2014년 5월 25일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노동당청소년위원회 [선언] (2014.05.27.)
“돈보다 생명이 먼저”라고 외치는 노동당은
- 투표소 앞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 보장을 위한 일인시위를 경찰과 선관위가 탄압한 것에 대해 규탄하는 자리에서,
- 청소년의 건강권을, 그리고 조건 없는 급식을 요구하는 행동이 있던 곳에서,
- 보수 성향 서울시교육감의 학생인권조례 개악 시도를 저지하려는 기자회견에서,
- 그리고 이외에도 지금까지 수많은 청소년에 대한 차별과 폭력에 반대하는 현장에서 함께 해왔습니다.
그리고 노동당 청소년위원회 또한
- 한국 정당 내에서 유일한 청소년 부문의 위원회로서,
- 셧다운제에 반대하며 여성가족부 앞에서 벌인 밤샘게임시위 등 청소년의 문화적 권리를 쟁취해나가는 싸움 속에서,
- 통합진보당 청소년 당원 제명 사태 대응을 비롯한 정치적 권리 쟁취를 위한 연대 활동과 ‘청소년 정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포럼 등 청소년 정치로 나아가기 위한 실천 속에서,
- 신자유주의 경쟁교육구조를 바꾸고, 학벌이 철폐되며, 청소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열심히 투쟁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나갈 것입니다.
‘청소년’의 존재가 억압의 굴레를 벗어나 당당한 주체로 서는 길에,
누군가가 사회적 소수성을 지녔다는 이유로 행해지는 모든 폭력을 철폐하는 길에,
돈보다 청소년의 자유와 생명이 중시되는 세상을 만들어 나아가는 길에
든든히 함께할 노동당을 지지합니다.
지지선언에 함께 해주신 청소년 ·청소년 활동가(총 57명)
[경기, 고양, 구미, 부산, 서울, 수원, 안산, 안양, 용인, 인천, 파주 등]
강민진, 곽건호, 귀모, 그링, 김건, 김대환, 김민관, 김지현, 김채영, 다인, 델라, 동이, 루블릿, 류호철, 리암, 목성돼지, 바냐, 박건진, 박재현, 박종하, 박하루, 보다, 빙빙, 서린, 성동석, 손호성, 솜, 송을채, 심슨, 아즈, 안준수, 야자수, 양지혜, 오진식, 유글, 유혜원, 으비, 이대영, 이울먹, 이찬우, 임한결, 정다민, 정우, 주신원, 최소류, 최승원, 최승원, 택이, 필부, 학민, 학인, 허지형, 황진영, 희정, 히카리, Codename :: Soul, OYEH
2014년 5월 27일
노동당 청소년위원회
[지지의 한마디들]
“지방선거 승리!”
“청소년이 우뚝, 노동자가 우뚝 서는 세상 그날까지!”
“함께해요 우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고, 시대에 진리가 파묻히지 않듯이, 그렇게 정진합시다.”
“응원합니다. 화이팅! :)”
“파이팅”
“학교에도 민주주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청소년을 정치의 주체로!”
“청소년을 일방적 보호와 억압의 대상으로 보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한 번씩 경험해본 문제입니다. 청소년도 하나의 인격체이자 주체로서 당당히 사회에 자리하게 될 날을 염원합니다.”
“그래도 희망은 노동당”
“함께 해요!”
“ファイトだよっ”
“청소년에 의한, 청소년을 위한 평등, 생태, 평화 공화국으로!”
“젊은이들이여 모이고 생각하고 행동하자”
“돈보다 생명이 먼저입니다. 파이팅!”
“청소년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지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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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코(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회원), 「인권오름」 (2014.04.03.)
어린 것들의 말꼬투리 잡기 - 무엇이 우리를 예의 없게 만들었나
청소년활동가들에게 대뜸 반말을 하는 상황부터, ‘아이들’ 같은 단어가 포함된 구호에 이르기 까지 여러 가지 사례들에 대해 청소년단체와 활동가들은 단체적/공식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문제제기를 해 왔다. 이런 경우 우리가 경험하는 반응들은 대부분 방어적이거나 심지어는 권위적이었다.
우리는 왜 말꼬투리를 잡는가
많은 사람들이 청소년운동에서 하는 문제제기들이 사소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전체를 보지 못하고, 너무 깐깐하다는, 거칠게 말하면“왜 말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냐”는 반응을 보인다. ‘아이들’ 혹자에게 이것은 그저 아동․청소년을 타자화하거나 비하할 의미를 추호도 담지 않고 쓴 하나의 단어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어휘가 사회적으로 갖는 의미, 이 단어가 의도하는 이미지들이 버젓이 있는데도, 비하의 의도를 담지 않고 ‘자연스레 쓸 수 있는’ 표현이라는 것에 우리는 주목한다. 아동․청소년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전혀 청소년인권 친화적이지 않은 것들이 ‘그런 것 쯤’으로 치부되기 때문에 문제제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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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라는 단어가 기성세대를 대상으로 효과적으로 다가가기 때문에 전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는 반응에도 함께 적용해 볼 수 있는 문제의식이다. 왜 청소년들은 운동의 전략적 홍보대상이 아닐까? 청소년을 설득의 대상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번 더, 자연스럽게 ‘우리’와 ‘아이들’은 구분된다. 아동․청소년을 운동의 주체, 혹은 설득의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는 비청소년의 입장에서 지극히‘자연스러운’ 무의식의 흐름이 언어로 나타나는 것을 포착할 때, 청소년운동은 ‘말꼬투리’를 통해 이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만약 이런 문제제기가 받아들여진다고 해도, 우리는 다음 장벽에 부딪히게 된다. “그러면 어떤 표현을 쓰면 될까요?” 언뜻 꽤나 괜찮은 해결 상황인 듯 보이나 힘이 쭉 빠지게 된다. 기존 운동에서 청소년도 주체로 설 수 있기 위해 지금까지 어떤 부분들이 청소년을 배제하고 사고되어 왔는지에 대해 관점을 바꿔서 고민하는 대신, 그저 한 단어를 다른 단어로 대체하는 문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청소년활동가들은 기계적으로 ‘새로운 질문’ 대신 ‘다른 정답’을 들고 와서 이렇게 저렇게 바꿔 달라고 주문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 뒤에 남는 것은 ‘청소년 운동 하는 사람들 무섭다.’, ‘말 한 마디 잘못 하면 큰일 난다.’는 식의 이미지뿐인, 씁쓸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잡는 ‘말꼬투리’는 그저 한 마디의 말이 아니라 인식과 고정관념의 변화에 대한 요구인데도.
‘예의’라는 진흙탕
청소년활동가들, 혹은 청소년단체의 문제제기가 그 내용이 아니라 태도나 모양새에 대해 평가받는 일도 드문 일이 아니다. “너무 과격한 거 아닌가요?”라던가 “문제제기 이전에 예의를 지켜주셨으면 합니다.”라는 유의 반응들이다. 여기서 질문 하나. 만약 어떤 지긋한 나이의 남성 비청소년이 집회에서 “요즘 운동이 너무 안일해 졌다. 좀 더 강하게 투쟁해야 한다.” 고 거친 언어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면, 이에 대해 누군가가 ‘문제제기 이전에 예의’를 지켜달라고 주문하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을까?
다른 누군가에게 주로 예의를 지킬 것을 요구하는 쪽과 요구받는 쪽은 대개 정해져있다. 아무리 예의는 ‘상호간에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 해 봤자, 많은 경우 나이가 많은 이들이 나이가 어린 이에게 예의를 지킬 것을 주문한다. 이는 자신보다 미성숙하다고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던 주체가 자신에게 문제제기 했을 때 그 내용과 상관없이 발동되는 방어기제이다. 하는 말이 타당한 건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는데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나쁜’것이다.
“문제제기 내용에는 동의하지만 예의를 지켜줬으면 좋겠다.”는 말은 사실상 “예의를 지켜라”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문제제기의 내용은 사실상 중요하지 않게 되고, 이야기를 ‘들어줄’만한 가치가 있을 만큼 충분히 ‘공손했는지’가 사실상의 갈등지점이 된다. 문제제기하는 상황에서조차 나이권력이 작동하게 된다. 이는 청소년인권 친화적이지 않은 단어를 사용하고 말고 보다 훨씬 문제적 상황이 된다.
요구하는 것은 새로운 관점의 질문들
이번 ‘아이들’논쟁은 여러 종류의 가지를 쳤다. 그 중에는 물론 사회에 청소년인권의 주장을 던졌을 때 흔히 돌아오는 반응들도 여럿 있었다. 사실상 청소년은 보호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청소년이 주체로 선다면 책임 또한 비청소년과 동등해야 하는 것 아닌가?
청소년운동은 이 질문에 대해 ‘예’ 혹은 ‘아니오’의 대답이 아니라 다른 시각에서의 질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청소년을 보호받아야 하게 만드는가? ‘보호’를 위해 보호받는 이의 권리를 제약하는 것은 타당한가? 정말로 청소년‘만’ 미성숙한가? 나이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 청소년은 비청소년과 같은 책임을 질 수 있을 만큼의 사회적 권리와 인식과 기반을 보장받고 있는가? 지금 비청소년이 지는 ‘책임’은 비청소년들에게도 부당하고 무거운 것은 아닐까? 청소년만이 누린다는 여러 ‘혜택들’을 비청소년도 누릴 수 있어야 되는 것 아닐까?
청소년운동이 기존운동판에 문제제기를 하는 이유는 많은 이들이 하는 말처럼 ‘애꿎은 동지에게 화살을 돌리는’것도 아니고, 사회를 바꿔내는 것보다 ‘만만해 보여서’도 아니다. 동의할 수 있는 공통의 운동적 지향점이 있고, 소통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기대하기에 문제제기하고, 함께 하고 싶은 욕구가 있기에 문제를 제기 한다. 문제제기를 마주했을 때 화를 내거나, 방어하거나 혹은 기계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문들을 함께 던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수수(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회원), 「인권오름」 (2014.04.03.)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이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 그에 관한 좀 더 친절한 설명
‘어른’중심적 사회와 ‘어린 것들’에 대한 일방적 보호주의
굳이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이 아니더라도, 아수나로를 포함한 많은 청소년인권운동단체들은 ‘우리 아이들’ 이라는 수사에 꽤나 오랫동안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왔다. ‘우리 아이들’이란 말은 ‘아이들’이 스스로 부를 수 없는 문구이다. 이는 ‘어른’들에 의해 말해지는 것이며 그렇기에 ‘아이들’을 배제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딜 가나 ‘우리 아이들’이란 말을 꽤 쉽게 들을 수 있다. “우리 아이들을 도와주세요!”, “우리 아이들이 희망입니다!” 그것은 이 말이 어른들의 연민과 동정심, 그리고 보호욕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런 말들이 너무도 쉽게 내뱉어지는 것은 우리 사회가 ‘성인’중심으로 굴러가고 있고, ‘아이들’을 ‘미성년’, 즉 아직 성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차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지금 ‘아이들’ 이 ‘어른들’과 꼭 같이 성숙하다는 주장을 펼치려는 것은 아니다. 성숙과 미성숙을 논할 때 우리는 성숙함이란 어떤 것이고 그것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지, 완벽한 성숙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등을 따져보아야 한다. 단순히 나이를 기준으로 미성숙한 집단을 나눠버리는 것은 성별을 이유로, 인종을 이유로 능력이 떨어질 것이라 생각해왔던 다른 차별 사례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어린 사람들을 미성숙하다고 쉬이 간주하는 행위는 어린 사람들을 지켜주고 보호해야만 한다는 ‘보호주의’로 나아간다.
여러 곳에서 여러 번 말해왔지만 ‘보호주의’와 ‘보호’는 다른 것이다. ‘어른’들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보호를 필요로 한다. 물론 ‘아이들’이 사회적으로 약자이니만큼 더 많은 상황에서 다양한 맥락에 따른 보호가 필요하다. 반면, ‘보호주의’란 ‘아이들’을 몽땅 모든 영역에서 강제적인 보호의 대상으로 묶어버리는 것을 뜻한다.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보호주의적인 시각은 이런 식으로 발현된다. 최근 서울시교육청이 시행하겠다고 밝힌 스마트폰강제규제어플 ‘아이스마트키퍼’는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스마트폰 기능을 그들이 학교에 있는 동안 차단해버린다. 학생의 동의를 거친다고 하나, 그 과정은 마치 야간자율학습이 강제적으로 행해지는 것과 거의 동일할 뿐이다. 이런 뜨악한 감시와 규제를 벌이는 ‘아이스마트키퍼’의 이름은 아이들을 스마트폰의 폐해에서 지켜준다는 뜻이다. 난데없이 모든 서울시 학생, 청소년들을 스마트폰에서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어버린 ‘보호주의’는 보호라는 이름으로 스마트폰의 사용과 기능을 감시, 차단했다. 정작 당사자인 ‘아이들’은 그를 필요로 하지도, 필요하다고 말 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이는 ‘보호’가 아니라 보호라는 이름으로 어린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폭력일 뿐이다.
진보적이라는 운동사회 역시 위의 상황들과 별반 다르지 않고, 여전히 그렇다. 2007년 촛불이 거세지고 10대들이 ‘촛불소녀’로 호명되며 거리로 나왔을 때 운동사회의 ‘어른’ 단체들은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는 종이홍보물을 배포했다. 무엇으로부터 지켜주자는 것인지 잘 알 수도 없는(정치로부터? 광우병으로부터? 이명박으로부터? 그렇다면, 왜 ‘아이들’만?) 저 문구는 ‘취약함, 보호욕구를 자극하는, 자신들보다 낮음’을 함축하고 있는 ‘아이들’의 이미지를 재생산했으며, 매우 잘 소비되었다. 자발적으로 집회에 나온 40대의 중후한 중년 남성을 ‘지켜주자’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어린 것들의 자발성과 주체성은 이렇듯 어른들의 괜한 보호욕구에 의하여 쉽게 무시되며, 결국 어린 것들은 고작 나이라는 요소로 인하여 어른들과 무언가를 동등하게 말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은 어떤 ‘미래세대’를 뜻하는 것일까
아, 이번 논쟁의 핵심이 되었던 문구는 ‘우리 아이들’ 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이라는 점을 이쯤에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앞의 보호주의에 기반을 둔 언사들이 자신들을 철저히 ‘어른’ 과 ‘보호자’로 상정하고 있는 반면,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은 누가 말하고 있는지 모호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이 무슨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는 많은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이들’이란 미래 세대를 뜻하는 것이다. 핵 없는 세상은 현재 우리 세대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이 구호는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의식을 반영한다.” 하지만 이런 말-들에 ‘정말?’ 이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여러모로 보아도 꽤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된다.
핵발전소는 현재의 저비용과 고효율을 위해 위험과 환경파괴를 몇 십 년과 몇 백 년 후로 떠넘기며 운영된다. 현재 세대들은 살아있는 동안 위험이 발생하지 않길 바라고, 미래의 리스크를 외면한다. 그렇다. 핵발전이 함부로 미래를 저당 잡은 현재의 착취이니만큼 반핵운동이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의식을 사회에 요구하는 것은 온당하다. 그러나 문제는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이 담백하게 정말 이러한 의미만을 담고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 그 속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우선 이 구호를 외치는 사람이 누구로 여겨지느냐를 알아야 하며, 그 발화자가 어떠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는가도 꼭 짚어봐야 한다. 이 구호를 외치는 반핵과 녹색 운동단체들은 그렇다면 어떠한 맥락을 가졌던 것일까.
녹색운동에서 꽤 큰 역할을 하며 녹색평론의 편집자이기도 한 김종철씨는 과거 어떤 강연회에서 “얼마나 애들이 약합니까. (...) 약간 손지껌하면 체벌이라 이러고, 물론 저도 체벌은 안 좋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부모가,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를 선생이 가르치는데 있어서 때때로 매질을 안 할 도리가 없잖아요. 안 하는 게 이상하지... ” 라는 발언을 해 구설수에 올랐다. 김종철씨 개인을 비난하기 위해 끌어온 기억은 아니다. 해당 강연의 내용에 대하여 다른 녹색운동 모임에서 문제제기를 했지만, 그것은 왜 20대인 자신들을 비하하느냐는 것에 중점이 맞춰져 있었을 뿐, ‘아이들’에 대한 체벌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는 아니었다.1) 이렇듯, 녹색운동을 하는 상당수의 ‘어른’들이 가족주의와 청소년보호주의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녹색을 가치로 하는 대안학교에서는 생태주의적 삶을 이유로 학생들의 휴대폰을 강제수거하기도 하며, 녹색을 말하는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컴퓨터를 금지하거나 강제로 채식을 시키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귀농과 맞닿아있는 어떤 생태운동은 전근대적인 농경시대의 가족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버리는 오류도 심심찮게 보이고 있다. 경기 녹색당은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꿈 피어라! 교육예산 잘 쓰면 우리 아이들이 행복합니다.” 라는 플랜카드를 걸었다. 그렇기에,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은 결코 담백한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의식에서 기인한 문구’ 라고 보이지 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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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아이들’을 억압하며 ‘아이들’에게 차별적인 맥락은 꼭 녹색운동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인권운동과 아수나로는 그동안 ‘아이들’을 타자화하고 배제하며, 소수자를 차별하는 모든 운동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왔다. 아수나로는 심지어 아수나로와는 정 반대의 입장을 가진 청소년 단체였으나 그 단체를 “어른들의 정치이념놀이에 희생양”이 되었다고 한 교육단체를 비판하기도 했었으며2),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은 퀴어문화축제의 청소년을 배제하는 뒷풀이 문화에 대한 비판과 대응을 하기도 했었다. 청소년인권운동이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 드넓게 드리워진 어린 것들에 대한 차별을 바꿔내기 위함이다. 그만큼 어린 사람들에 대한 차별은 만연하며, 그래서 사실 청소년인권감수성을 특별히 보인 발화자가 이런 말을 하지 않은 이상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이란 문구는 차별적인 맥락을 담기 십상이게 되는 것이다.
이번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문구의 ‘아이들’ 차별적인 맥락은 굳이 발화자의 역사를 일일이 다 따지거나, 우리 사회의 차별적 태도를 찬찬히 읽어내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쉽게 짚어낼 수 있긴 하다. 애초 이번 문제제기의 발단을 제공한 3월20일 ‘아이들에게 핵없는 세상을!’ 탈핵 강연의 홍보 문구는 이러하다.
내 아이가 뛰어노는 이 땅,
우리가 눈을 감는다고 안전할까요?
'김00'교수의 강좌는 이런 메시지를 전합니다.
1. 방사능으로 오염된 일본산 식품이 우리나라에 유통되는 현실
2. 알게 모르게 매일 세슘, 플루토늄을 먹고 사는 내 아이와 가족
3. 핵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들이닥친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합니다.
(출처 ‘인천녹색연합’)
이 홍보문구가 호명하는 ‘아이들’이 담백하게 ‘미래세대’가 아니라는 것은 여기서 명확하다. ‘음식은 ‘내’가 먹으며, 이 땅은 ‘내 아이’가 뛰어논다. 세슘, 플루토늄은 ‘내 아이와 가족’이 먹고 산다. 이 강연회의 주제는 탈핵과 가족이 아니라 ‘핵이 현재 우리에게도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진실을 폭로하는 것’이다. 이 홍보문구는 철저히 ‘아이들’을 자녀로 둔 ‘나’, 즉 ‘어른’만을 반핵과 탈핵 운동에서의 주체로 상정하며, 핵이 존재하는 사회 속에서 그 ‘어른’들과 함께 핵의 위험을 몸소 겪고 있는 ‘아이들’을 운동에서의 비주체, 더 나아가 “세슘과 플루토늄으로부터” 지켜줘야 하는 타자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이 담백하게 미래세대를 뜻할 수 없다면, 해당 문구를 ‘미래세대에게 핵 없는 세상을’ 이라 고치면 이 타자화와 배제, 강제적인 보호주의의 굴레를 모두 벗을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미래세대라는 말 역시 위험하다.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 꼭 따라붙던 수식어는 ‘미래의 일꾼’ 혹은 ‘미래의 희망’이었다. ‘자라나는 새싹’ 역시 ‘아이들’을 수식하는 보편적인 언어이다.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평균적으로 더 오래, 미래까지 살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나, 그들을 ‘미래’로만 묶어두는 것은 ‘아이들’이 ‘어른들’과 함께 현재를 살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자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현재를 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된다. 현재의 ‘아이들’이 현재를 사는 주체임을 부정당하며 미래로 묶여지게 되기에, ‘미래세대’라는 단어 역시 자연스럽게 이러한 함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http://hr-oreum.net//photo/8/2664/susu2.jpg)
![위 사진:](http://sarangbang.or.kr/bbs/skin/_photo/transparent_border/up_arrow.gif)
‘우리 아이들’이란 문구만이 문제는 아니다
탈핵운동이 굳이 자꾸 '아이들'을 부르는 것은 청소년에 대한 사회의 지배적인 이미지를 문제의식 없이 활용하는 것이며, 이런 활용은 청소년 보호주의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데도 기여하게 된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나이 어린 집단을 탈핵운동의 주체로 포함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청소년인권운동은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이란 문구에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논란이 된 성명에서는 ‘우리 모두에게 핵 없는 세상을’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반핵과 탈핵을 주장하는 것, 더 많은 사람들이 핵 없는 세상을 곧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 그것이 탈핵에 대한 강연회를 열고,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는 이유 아닌가요?” 아수나로의 성명의 일부이다. 뭐 더 좋은 대안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방사능으로 오염된 일본산 식품이 우리나라에 유통되고”, “알게 모르게 우리 모두가 세슘과 플루토늄을 섭취하고”, “핵의 세상에 우리 모두가 살고 있” 다면 우리는 아이들, 어른 그리고 그 외 어떤 구분도 없이 모두 함께 ‘핵 없는 세상을’ 외칠 수 있는 언어를 찾아야만 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혹은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을 둘러싼 많은 이야기를 녹색당과 아수나로 사이의 논쟁을 통해 접한 분들이 많을 것이다. 청년녹색당은 이번 일을 계기로 “청소년뿐만 아니라 다른 소수자를 배제하는 언어사용이 없었는지 되돌아볼” 것을 표명하였고, 녹색당은 내부의 의견을 수렴해서 곧 입장을 내겠으며, 더 풍부한 논의를 위해 아수나로와 함께 간담회를 하고 싶다는 제안을 해주었다. 거듭 밝히듯 아수나로의 이번 문제제기는 녹색당만을 타겟으로 한 것이 아니며, 이것은 또한 녹색당만의 문제가 아니다, 녹색/환경운동, 그 이외 다른 많은 운동사회, 나아가 우리 사회 전반의 나이에 따른 위계와 청소년보호주의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더 많은 문제제기와 더 많은 행동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더 많은 마찰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제기는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무례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현실을 잘 모르는 투정으로 치부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회운동은 그러하듯, 청소년인권운동 역시 같은 ‘운동’으로써 지속적인 움직임을 보일 것이며, 이 글을 읽는 여러 분들이 함께 해주셨으면 할 것이다.
1) http://m.cafe.naver.com/waithongbo/1788(김종철님의 강연록에 대한 문제제기)
2)http://cafe.naver.com/asunaro/36015 “[논평] 청소년단체의 주체성을 무시하는 것에 반대한다
- 한국청소년미래리더연합의 활동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의 입장에 대해“
누피(청년초록네트워크), 「인권오름」 (2014.04.10.)
내 삶은 무언가 결정적인 게 없었다. 특목고가 아닌 대안학교를 선택했을 때도, 처음 청소년운동을 시작했을 때도, 밀양에 처음 갔던 것도 분명한 이유가 있던 게 아니었다. 항상 ‘어쩌다 보니’ 그곳에 가게 되었고 어느 순간 정신 차려 보니 그 속에 내가 있었다. 그런 ‘어쩌다 보니’ 인생 속에서도 특별히 기억나는 몇몇의 순간들이 있는데 처음 학교를 자퇴하던 순간과 처음 녹색과 탈핵을 접했을 때의 기억이다. 사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녹색․탈핵 운동이 처음 나에게 ‘다가온’ 순간이었을 것이다.
어쩌다 보니 가게 된 밀양에서 송전탑의 위험과 탈핵의 필요성을 말하는 주민들을 만났다. 여태껏 나와는 상관없다 생각했던 녹색과 탈핵이 그들을 통해서 나에게 다가온 것이다. 이전에도 탈핵이 필요하다는 말은 여러 번 접했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혹은 예쁘고 착하고 이상적인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전해 들은 녹색과 탈핵은 그저 예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녹색과 탈핵은 절박한 현실이었고, 생명이었고, 또 자신의 삶에 당면한 과제였다.
밀양의 주민들이 바라는 것은 거창하지 않다. 많은 보상금을 달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냥 그대로 ‘함께’ 살고 싶다는 것이 그들의 이야기다. 몇 십 년간 한 동네에서 살아온 이웃들과, 밤나무와 감나무와, 자신들이 키우는 깻잎, 돼지들과 ‘함께’ 살고 싶을 뿐이다. 어느 순간 나도 그 동네가 마음에 들었고, 그들과 정이 들어서 ‘함께’ 하고 싶다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이 말하는 녹색․탈핵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하는 녹색의 가치는 바로 이 ‘함께’이다. 나 혼자 잘 살자고 핵발전소를 짓고 송전탑을 꽂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감나무가, 돼지들과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 ‘함께’라니, 그저 예쁘고 착한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이 ‘함께’가 녹색운동의 핵심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유한하기에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분배의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유한한 지구를 지속 가능하게 이용할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녹색운동이다. 이번 녹색운동 진영과 청소년운동 사이의 논쟁이 바로 이 지점, 유한함과 지속 가능함의 고민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우리는 미래 세대라고 불리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이들에게 오염된 자연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그들은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은 지구에서 살 권리가 있고, 지금 살고 있는 우리는 그들에게 깨끗한 환경을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 맥락으로 환경운동(특히 탈핵운동)에서 사용하는 구호가 ‘우리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이다. 나는 그들이 사용하는 구호가 어떠한 맥락에서 나왔는지 알 수 있다. 핵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그들의 진심을 왜곡하고 싶은 생각 또한 없다. 다만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 ‘우리 아이들’에는 동의할 수 없다.
언어는 힘이 세다. 말과 글은 우리의 의식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더 나아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틀을 만든다. 그 예로서 ‘장애우’라는 단어를 한번 살펴보자. ‘장애우’는 장애인들의 주체성이 삭제된, 그들을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관점이 담긴 언어다. 장애를 가진 당사자가 자신을 ‘장애우’라고 칭하는 것은 어딘가 어색하다. ‘장애우’라는 단어가 친구라는 뜻을 가졌기에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1인칭 명사로 사용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장애우’는 그들이 원하던 원하지 않던 ‘장애우’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장애를 가지지 않은-사람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장애인이 당사자가 아닌 타자로서만 존재하는 단어이기에 장애운동 진영은 (투쟁의 당사자로서 장애인을 배제하는) ‘장애우’라는 단어를 거부하는 것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장애인 당사자가 시혜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이고 투쟁의 주체인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아이들’이라 칭해지는 어린이-청소년 당사자들 또한 이 사회의 일원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 이라는 문구에는 지금의 (핵 있는)세상에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의 존재가 없다. 사실 그들은 이미 핵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 말이다. ‘우리 아이들’은 그저 ‘어른들’이 지켜주어야 할 여리고 가냘픈 대상으로서 존재하고, 무력할 뿐이다. 그들은 (핵 있는)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정되지 않는다. 함께 투쟁할 동지로서 인정받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단어 하나에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순한 단어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예민하게 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언어에는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담겨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우리 아이들’이라는 말에는 당사자로서 투쟁하는 어린이-청소년들의 존재가 삭제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는 말과 같은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기에 투쟁의 주체인 어린이-청소년들은 비(非)가시화된다.
나는 밀양의 주민들을 짓밟는 국가폭력의 횡포에 맞서기 위해 밀양에 갔다.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활동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미콘 앞에 뛰어들고 크레인 차량 아래 드러눕기도 하면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실천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렇게 활동하는 것이 나의 신념을 지키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나는 ‘기특한 아이’고 이쁜이’였지 ‘연대동지’가 될 수 없었다. ‘우리 아이들’의 프레임 안에서는 주체적으로 활동하는 어린이-청소년인 나의 존재가 부정될 수 밖에 없었다.
나를 기특한 아이, 이쁜이로 칭하고 그렇게 대하는 이들이 나를 부정하기 위해 그렇게 행동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현장에서 활동하는 청소년을 거의 보지 못해서 신기하기도, 기특해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좋은 뜻으로 나를 칭찬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라는 서양의 속담처럼, 선의가 항상 좋은 결과를 낳지는 않을 뿐이다. 나는 기특한 아이가 아닌 그들의 동지로써 존재하고 싶었다.
그들의 선의는 결과적으로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4000장의 탄원서 - ‘활동가’가 될 수 없었던 ‘품 안의 아이’
어린이-청소년들을 타자화하고 배제하는 언어는 ‘함께’의 가치와 부합하지 않는다. 이는 비단 ‘우리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이라는 구호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비(非)가시화된 어린이-청소년 주체는 ‘동지’가 아닌 ‘기특한 아이들’로 치환된다.
내가 현장에서 했던 활동들은 나로부터 비롯되었다. 밀양의 주민들과 함께하며 느꼈던 안타까움과 국가폭력에 대한 분노가 내 마음을 움직이는 계기였지만, 그 감정을 행동으로 옮긴 것은 나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주체로서 드러나지 못하는 나의 판단과 실천은 ‘연대’가 아닌 ‘기특함’이 되어버렸다.
2014년 1월 7일, 나는 카고크레인 아래에 들어가 밀양송전탑 공사를 저지하다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곧이어 구속영장이 청구되었고 영장실질심사를 앞둔 당시 밀양송전탑 반대대책위는 탄원서를 배포했다. 대책위의 탄원서 역시 그런 시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
송전탑 공사를 반대하기 위한 ‘활동’으로 체포되었지만 그 탄원서 안에서조차 나는 현장에서 활동했던 ‘활동가’로 불릴 수 없었다. 내가 밀양에서 했던 활동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내가 어떤 이유와 맥락 속에서 크레인 아래 들어가게 되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구속되지 않아야 할 가장 큰 이유는 나이 어린 19세 청소년이고 곧 대학 입학을 앞둔, 앞길이 창창한 청소년이기 때문이었다.
같이 체포되어 영장이 청구되었던 다른 활동가의 탄원서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그는 나이로 평가받지 않았고, 영장 청구의 부당함 또한 그의 활동으로서 설명되었다.
“재판장님, ○○○ 님은 ○○○이라는 시민단체 상근활동가로서 우리 사회가 보다 민주적이고 공공성을 갖출 수 있도록 7년 동안 활동해 왔습니다. 사회에 대한 책임이 무엇인지 아는 시민단체 활동가로써 도주의 의사가 전혀 없으며 증거를 인멸할 사안도 아닙니다. 양심에 따른 행위를 부끄럽게 만들 이도 아닙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밀양 송전탑 공사 현장에서 현행범 체포되어 경찰에 의해 구속영장이 청구된 열아홉살 조은별의 탄원을 위한 글을 드립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조은별은 올해 3월, 성공회대학교에 입학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19세 청소년입니다.”
많은 이들이 감동했다고, 눈물을 흘리며 읽었다고 이야기하는 내 부모의 탄원서 또한 나를 철저하게 대상화시켰다.
“밀양의 눈물, 밀양의 아픔을 외면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직장, 좋은 직업을 얻어 혼자만 잘먹고 잘살면 된다고 그렇게 가르칠 용기가 없었던 저희들 부모의 잘못일 것입니다.”
위 탄원서에는 내가 그렇게 행동하게 된 맥락과 그런 실천의 바탕이 된 나의 판단은 사라졌고, ‘불의를 외면하지 못하게 키운 부모의 잘못’만이 남았다. 또한 나는 투쟁의 주체인 ‘활동가’가 아니라 ‘그 어린 것, 품속의 아이’ 등으로만 호명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투쟁의 ‘주체’로서 가시화될 수 없었고, 구속영장의 부당함을 내 ‘활동’의 정당성으로 입증할 수 없었던 것이다. 품속의 아이로, 불쌍한 아이로, 감정에 호소할 수밖에.
대책위의 탄원서에도, 내 부모의 탄원서에서도 나는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존재했다. 구속영장의 부당함은 내 활동의 정당성으로 증명되지 못했다.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결과적으로 그 탄원서들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내 부모의 탄원서는 주요 일간지에 기사화되기까지 했고, 대책위에는 탄원서가 쉬지 않고 들어왔다. 영장실질심사 전까지 주어진 이틀 남짓한 시간동안 모아진 탄원서는 3천장이 넘었고, 내 구속영장은 기각되었다.
녹색․탈핵운동 진영에서 ‘우리 아이들’의 프레임을 버리지 못하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어린 아이들, 아무런 잘못이 없는 순결한 대상. 어른들의 죄를 짊어지고 가야 할 우리 아이들을 지켜주자. 이러한 이야기는 감정적인 동조를 이끌어내기 적합하다. 거친 표현으로 ‘잘 팔린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주장하는 바를 알리고 지지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 이들로써는 이런 카드를 포기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손쉬운 방법은 지금까지의 방식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아이를 걱정하는 수많은 ‘엄마’들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다. 우리를 대상화시키지 말라, ‘동지’로 인정하라는 청소년활동가들의 주장은 ‘메타포(은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족함으로 치부하면 그만이다.
사실 어린이-청소년 주체들은 꿈나무, 미래 세대가 아니라 이미 사회의 구성원으로 존재하고 있다. 녹색․탈핵 운동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이제는 그들을 계속해서 대상으로서 이용할 것인가, 동지로서 손잡고 나갈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http://hr-oreum.net//photo/15/2671/milyang1.jpg)
이 판단의 지점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녹색운동의 가치라고 말했던 ‘함께’다. 손쉽고 효과적인 방법인가, 녹색의 가치인 ‘함께’인가? 나는 녹색운동을 하는 이들이 청소년들을 보호대상으로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할 동지로 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린이-청소년을 대상화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주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함께’의 시작이라 말하고 싶다.
또한 이 '함께‘는 녹색․탈핵 운동에만 한정된 가치는 아니다. 손해배상소송을 당한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손잡고>, 해고자들과 함께하는 <와락 프로젝트>, 우리가 여기서 ’함께‘하고 있노라, 외치는 성소수자 운동들도 모두 ’함께‘의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 그렇기에 내가 이야기하는 어린이-청소년의 주체성을 녹색․탈핵운동 진영만이 아닌 운동사회 전반에 이야기하고 싶다. 여러분이 이야기하는 ’함께‘의 실천을, 우리와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배경내(청소년노동인권네트워크), [문화빵] (2014.04.24)
한낱(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인권오름」 (2014.05.01)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말 그대로 공부만 하고 살았다. 기구한 노력에 대한 보상은 나쁘지 않았다. 대학입시만큼이나 치열했던
고교입시를 무사히 통과했고, 지역에서 이름난 비평준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경쟁이 경쟁인 줄도 모르고 살았던 시절. 결석했던
친구에게 필기를 보여주지 않기 위해 공책을 두고 왔다 거짓말을 한 건 1학년 때까지였다. 나중에 가서는 거짓말조차 하지 않았다.
다들 그렇게 살았으니까. 성공은 어떠한 조건에서도 내 갈 길을 가는 사람에게만 돌아오는 거니까. 명확한 목표가 있는 나의 달리기에
거리끼는 마음 따위가 움틀 자리는 없었다. 그렇게 20년을 살아온 것이다.
살아온 삶이 마음의 깜냥을 정한다. 나의 소심함,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 어쭙잖은 완벽주의 등은 그렇게
길러졌다. 나는 내가 ‘밀양’이, ‘강정’이, ‘쌍차’가, ‘장애인’이, ‘청소년’이 되는 게 너무 어렵다. 그 세계에 온
마음으로 접속하고, 공명하고, 분노하는 게 솔직히 잘 안 되는 사람이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늘 곤혹스럽다. 길러진
나를 끊임없이 배반해야하기 때문에. 한 번도 일깨워본 적 없던 감각을 곤두세워야하기 때문에. 내 자신의 한계와 대면해야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과거에 붙들리지 않는 현재를 꿈꾸고, 이미 친구가 되어버린 그/녀들의 삶에 닮아가고자 ‘사람’의 곁을
서성거린다. 세월호 피해자 유가족들을 만나는 대통령의 표정과 복장에 대한 비판이 무성하다. 그러나 나는 그녀를 이해한다. 태생적
한계. 그녀는 길러진 대로 살고 있을 뿐이고, 한계를 넘어서는 어떠한 시도도 보인 적이 없다. 완벽히 사물화 된 인간. 그녀는
그저 굳건히 서있는 대한민국이며, 학교이며, 시설일 뿐이다. 그녀에게서 사람 냄새를 기대한 바 없으니, 실망할 겨를도 없다. 물을
수 있는 건 법적 책임이나 정치적 책임일 뿐 인간에 대한 예의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건 그러한 몸을 만드는 사회이자, 공간들이다. 공간은 사람을 만들고, 한 인간의 태생적 한계보다 더 지독한 건
공간의 태생적 한계다. 인권 친화적 학교라는 말은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다. 애초에 ‘착한 노동자’를 생산하려 만든 역사적 공간이
어떻게 인권적일 수 있다는 말인가. 청소년들이 학교와 유사한 곳으로 감옥이나 군대를 떠올리는 건 공간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맞닿아있다. 학생인권의 전통적 권리목록들은 그래서 기묘하다. 내 머리카락을 건드리지 말라, 때리지 말라, 함부로 물건을 뒤지지
말라는 요구는 학교 담장을 넘어서면 대놓고 유보시킬 수 없는 권리들이다. 장애인거주시설 등에서는 식당에서의 메뉴 선택권마저 찬반
논란거리가 된다. 한 사람의 온전한 삶을 지원하는 게 도무지 불가능한 공간들이 강제와 억압을 통해 유지된다. 두발 자유, 체벌
금지 등이 법적으로 보장된다 해도 또 다른 버전의 통제 방식들이 발명될 것이다. 시설의 메뉴선택권이 보장된다고 해서 시설
거주인들이 자유로운 삶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권리를 ‘득템’해도 인권에 도달할 수 없는 미끄러짐. 누군가는 이것을 인권의
한계라 말하기도 했다.
학교나 시설 내 인권교육을 할 때, 학교를 없애야 한다고, 시설을 없애야 한다고 속 시원히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만이
인권을 보장할 수 있는 길이라고 내지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학생인권을, 시설인권을 논하고 강조한다. 학교나
시설을 필요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다. 공간은 그 스스로 한계를 극복하거나 사라질 수 없다. 공간을 바꾸고 없앨 수 있는 건
다름 아닌 사람이다. 공간의 무용함을 증언할 수 있는 사람들, 권리의 역설을 깨달은 사람들, 그래서 그 공간이 인권적으로
운영되는 것 너머를 상상할 수 있는 사람들. 인권이 완벽한 언어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다만, 인권과 현실의 불일치가 만들어내는
틈새에서 변화의 가능성은 탄생한다.
어제 대통령이 국무회의 석상에서 비공개 대국민 사과를 진행했다. 사람 냄새 나지 않는 사과문을 통해 그녀는 ‘국가개조’를
천명했다. 그녀가 바꾸려는 것은 무엇이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여전히 과거에 붙들려 자신을, 국가를 지키고자 하는
그녀의 구상은 그다지 궁금하지 않다. 이 비통한 사건을 겪으며 사람들은 국가의 태생적 한계마저 사유하기 시작했다. 국가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러한 세상은 정치 기계 같은 대통령이 발붙일 수 없는 사회일 것임은 분명하다.
배경내(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탈핵운동과 청소년인권 간담회> 발제글 (2014.05.14)
녹색당과 청소년, 사회가 할당해준 감성을 벗어나 새로운 관계를 찾다
: ‘아이들에게 핵없는 세상을!’ 논쟁을 소멸시키지 않기 위하여
녹색당원이자 청소년인권활동가라는 이중의 위치 때문에 이 자리에 토론자로 초대받았지만, 사실 내가 녹생당원으로서의 정체성을 얼마나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고백하건대 나는 녹색당을 통해 당적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갖게 되었다. 인권운동 초기에는 인권활동가로서 당적을 갖는 데 부담을 느꼈었는데, 비교적 최근까지만 해도 인권운동은 '정치 너머'의 언어로 받아들여졌고 그를 통해 정당성을 호소하는 경향이 강했기에 나도 그 자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정치적인 것'으로서 인권을 사고하는 방향으로 인권운동이 전환되기 시작한 이후에도 당적을 갖지 않았던 것은 지금까지 어떤 당에도 강한 이끌림을 느낀 적 없었고, 흔히 지도력과 응집력이 강조되는 당 운동의 질서나 문화가 지도력이 아닌 ‘동료성’을, 기존 질서의 ‘해체’를 전제로 한 응집을 지향하는 인권운동의 문화와 과연 맞닿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랬던 내가 녹색당 가입을 결심한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제는 한 시대의 전후를 가름하는 이름이 되어버린 ‘후쿠시마’를 경험하면서 한국사회에서 탈핵이라는 명확한 지향을 내걸고 활동하는 운동(하나의 단체가 아닌 흐름으로서의 운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어쩌면 녹색당이라면 매우 다른 지향과 질서를 지닌 새로운 정당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당시 후쿠시마와 탈핵을 이야기해온 사람들은 권위주의적 정당운동과는 거리가 멀어보였고, <녹색평론>을 비롯하여 탈핵운동을 이끌어온 이들이 생태주의와 민주주의를 함께 고민해 왔다는 사실이 그 기대의 밑바탕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녹색당은 인권과 민주주의, 소수자에 대한 옹호 등이 명문화된 강령을 통해 나의 기대에 화답해주었다.
그러나 오늘의 자리가 마련된 배경이 된 ‘아이들’ 논쟁을 지켜보면서 내가 가졌던 기대를 녹색당이나 탈핵운동 안에 뿌리 내리기 위한 기획적 실천이 뒤따르지 못했다는 반성을 먼저 하게 된다. 아수나로가 던진 질문은 결국 녹색당원이자 녹색당에 기대를 건 인권활동가인 나에게 던져진 질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 사회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표적을 향해 외쳐질 때는 평등을 추구하나, 민주주의를 외치는 이들 내부를 바라볼 때는 여전히 불평등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재확인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2012년 김종철 선생의 청(소)년 세대에 관한 인식과 체벌에 대한 인식이 드러났던 강연 사건이나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이라는 구호를 둘러싼 논쟁을 돌아보면, 한국사회의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보호주의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알 수 있다.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그렇고, 이번 세월호 참사를 대하는 시민들의 반응에서도 그렇듯이, 보호주의는 단지 녹색당이나 탈핵운동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껏 근대가 아이들을 대하는 양식의 자장(磁場) 안에서 살아왔고 보호주의를 선한 어른들의 당연한 역할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청소년운동이 한국사회에서 등장하고 제기해온 목소리를 적어도 한두 번은 접했음직한 대안운동(진보운동) 안에서도, 청소년운동이 공개적으로 문제라고 지적해온 구호를 지속적으로 사용해왔다는 사실은 결국 청소년운동이 문제로 제기한 본뜻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거나 ‘작은 목소리’라는 이유로 모른 척 해온 것은 아닌지 반성해볼 일이다. 뒤늦게나마 이런 공개 토론 자리가 마련된 것은 고무적이나, 이번 논쟁이 근대가 형성해온 ‘아이들’에 대한 감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과제와 잇닿아 있는 만큼 이 논쟁의 결과가 어디로 향할지 모를 일이기도 하다.
‘우리 아이들’ 감성의 근대성
오늘날 우리가 가진 아이다움에 대한 관념과 아동기에 부여된 발달 과업이 근대에 형성된 역사적 산물임은 제법 알려져 있다. ‘남녀 칠세 부동석’이라는 조선시대 윤리는 당시 사람들이 일곱 살을 성적 실천이 가능한, 몸집만 작을 뿐 성인과 다름없는 존재로 바라보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오늘날 남녀 부동석의 규범적 시기는 2차 성징이 나타나는 나이로 늦춰졌다. 1832년 6월항쟁을 주 배경으로 한 영화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꼬마 혁명가 가브로쉬는 “우리는 예전에 자유를 위해 싸웠는데 지금은 빵을 위해 싸우네.”라고 노래했다. 가브로쉬의 말에는 시대를 꿰뚫는 통찰이 엿보인다. 항쟁에 참여한 누구도 그에게 ‘애들은 가라’와 같은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그는 전우(戰友)로 대접받았다. 오늘날이었다면 아동학대라는 비난이 쏟아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근대가 깊어지는 동안 점점 더 아이들은 특별한 보호의 대상이 되었고, 동시에 순진무구함의 표상이 되었다. 아동기는 학교교육의 발달과 연장과 함께 갈수록 길어졌다. 그렇게 스무 살 이전의 삶은 '꽃다운 나이'라는 수사가 무색하게, 무경험, 무기회, 무권력과 동일어가 되었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관점과 ‘아이들’이라는 존재에 반응하는 감성이 역사적으로 구성되었다는 말은 우리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우리 아이들’이라는 호명과 그에 수반된 감성이 어떤 모순과 부정적 폐해를 갖고 있는지 살펴보자. 우선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반응에서 드러나듯, 어른들은 ‘순진무구한 아이들’을 희생에 내몬 ‘타락한 어른들’을 제어하지 못해 미안해한다. 이때 자본, 관료제 등의 문제는 타락한 어른들의 문제로 일반화되어 버리고, ‘타락한 어른 vs. 덜 타락한 어른’이라는 허구적인 대립 구도가 들어선다. 그 결과 사고의 도덕적, 정치적 책임을 실체가 모호한 ‘어른’에게 묻는다. ‘어른 없는 세상에서 행복하길.’이라는 문구가 추모의 행렬에 등장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미안해하는 어른들이 왜 미안해하는지, 무엇에 대해 미안해하는지도 불명확하다. 그러니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지 못한다.
게다가 ‘아이들’에 대한 관심과 애도가 워낙 각별하다 보니, 비청소년 희생자들에 대한 관심과 애도는 뒷전이 된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 세월호에 승선한 20살 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아들이 ‘만 19살’임을 강조함으로써 애도의 자격을 얻었다. 올 초 폭설로 지붕이 붕괴돼 야간작업 중이던 노동자 2명이 목숨을 잃는 사건에 대한 반응도 유사했다. 희생자 중 한 명은 고교 현장실습생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30대 노동자였다. 대책은 갓 스무 살도 안 된 ‘현장실습생’에게 야간노동을 시키지 않는 데 집중되었다. 원청인 현대자동차가 폭설로 작업을 중단한 데 반해 하청인 금영ETS는 작업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던가에 대한 의구심, 폭설로 인한 사고는 주간에도 일어날 수 있었다는 개연성, 실습생이건 노동자이건 위험노동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요청은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또한 ‘순진무구함’의 허상에 기댄 보호만 강조되다 보면 정작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보호는 실현될 수 없다는 모순이 있다. 순진무구라는 관념에서 벗어나는 ‘아이들’의 행동은 놀랍도록 많고 많지만, 그것은 간혹 기특함의 대상이 되는 경우를 제외하곤 비난 또는 교정의 대상이 된다. ‘아이들’의 비판적 의견에 대해 대개 ‘내용에는 동의하지만 예의를 갖춰 말하라’는 식의 반응이 돌아오곤 하는데, 이는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이다움의 틀이 외려 눈앞에 있는 구체적 존재에 대한 다채로운 이해와 귀기울임, 관계맺음을 가로막고 오히려 ‘아이들’을 강제된 틀 속으로 집어넣는 셈이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가만히 있으라”는 어른들의 말만 믿고 기다린 순진무구한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은 강조됐지만, 가만히 있지 않고 살아남은 또는 살기 위해 고군분투한 ‘아이들’의 선택은 잘 주목받지 못했다.
순진무구는 미성숙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보호를 제공하는 자에게 보호의 내용과 범위를 일방적으로 결정할 특권이 주어질 위험이 크다. 이때의 보호는 자유, 동등성의 헌납을 대가로 요구하는 권력체계로 전환된다. 일방적인, 특권화된 보호를 보호 일반과 구분해 보호주의 혹은 보호 권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보호주의 또는 보호 권력 하에서 ‘아이들’은 미성숙해지고 무력화된다.
보호 권력의 양극단
보호 권력에는 양극단이 존재한다. 하나는 보호를 위장한 폭력적 권력이다. 찰스 디킨즈의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올리버는 다름 아닌 아동‘보호’소에서 학대와 착취에 시달렸다. 최근 진실규명의 외침이 울려 퍼진 형제복지원도 보호 권력의 가장 추악하고 잔인한 모습을 보여준다. 흔히 ‘아이들’을 보호하는 공간이라고 믿어지는 가정, 학교에서도 폭력은 실재하지만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 반대편엔 우아하고 성실한 보호 권력도 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에 등장했던 ‘아이들이 무슨 죄냐. 우리들이 지켜주자.’라는 구호가 대표적이다. 아무런 정치적 힘도 없는 아이들이 왜 정치권력의 잘못이 부른 피해를 뒤집어써야 하느냐는 맥락에서는 의미가 있는 구호다. 그러나 실제 촛불집회를 점화했고 집회에 참여하고 있던 아이들을 지켜줘야 할 대상으로만 한정짓고 ‘우리’(이 때 우리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시민을 의미했다)로부터 밀어내는 정치적 효과를 낳았다.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이라는 탈핵운동의 구호 역시 바로 이 우아하고 성실한 보호 권력 안에 머무른 표현이라는 점에서 청소년운동의 비판을 받았다. 이 구호는 ‘아이들’을 노골적으로 차별하거나 폭력적으로 대하는 언어는 아니다. 반대로 ‘아이들을 위한다’는 자세 자체에서 비롯되는 권력성 때문에 차별적인 언어라 볼 수 있다. 누구를 위한 운동이라는 의식 자체가 차별성을 내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아이들’은 ‘우리 어른들’이 만들어낼 핵 없는 세상의 수혜자이지 주체로 초대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구호는 ‘아이들’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우리 어른들’ 또는 ‘우리 부모’의 보호 감성을 건드림으로써 호소력을 얻고 있다는 점에서, 나이주의와 가족주의를 공고히 하는 데도 기여하고 있다.
물론 이 구호가 탈핵운동 내부에서 별 긴장 없이 받아들여진 배경에는 핵 발전이 미래세대의 희생을 기반으로 현세대의 편의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탈핵운동의 상식, 그리고 방사능의 피해가 ‘아이들’에게 더욱 치명적이라는 사실의 영향도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이 점을 십분 이해한다 하더라도, 이 구호가 미래세대가 아닌 현세대로서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을 배제하고, 더 치명적 피해를 입을 수 있는 당사자인 ‘아이들’을 주체가 아닌 보호의 대상으로만 상정한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언어를 돌려주기, 언어를 다시 만들기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이라는 구호를 지지하는 감성과 세월호 참사에 대한 시민들의 지배적 감성 사이의 공통점은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가 아닐까 싶다.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우리 예쁜 아이들을 살려내라.’는 말들이 넘실대는 지금, 살아있는, 살아남은 ‘아이들’은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왼쪽 사진에서처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 뒤에서 촛불을 든 채 서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기묘하기 이를 데 없다. 아무런 사회적 권력도 갖지 못한 이들이 미안해한다니! 미안함도 권력자의 전유물인 셈이다. 최근에서야 청소년 스스로 세월호 참사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오른쪽 사진의 청소년 추모집회에서 등장한 구호처럼, 미안함을 느낄 위치에도 서지 못한 ‘아이들’은 세상에 분노를 표한다. 그런데 이 분노의 구호는 비청소년도 공유할 수 있는 언어다. 사회적 약자인 ‘아이들’은 공유의 언어를, 사회적 강자인 ‘어른들’은 배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지금 ‘아이들’에게 미안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아이들’의 언어를 빼앗지 않는 일, ‘아이들’도 함께 외칠 수 있는 대안의 언어를 만들어내는 일이 아닐까. 핵 권력의 자리에 핵 없는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어른들의 보호 권력을 밀어 넣는 대신에, 권력 자체를 의심할 수 있는 기회, 자기 언어를 발견할 기회를 만들어내는 일 아닐까.
논쟁으로 소멸되지 않기
장애인운동이 ‘장애’를 만들어낸 근대적 양식의 폐해에 도전하는 운동이듯, 생태운동이 ‘자연’을 대하는 근대적 양식의 폐해에 도전하는 운동이듯, 청소년운동은 ‘아이들’ 혹은 ‘아이다움’을 대하는 근대적 양식의 폐해에 대한 도전을 업으로 삼는 운동이다. 청소년운동은 나이를 떠나, 보호의 제공을 일방화, 특권화하지 않는 ‘우정의 보살핌’ 관계들을 사회 전면에 확대하고자 노력한다.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이라는 구호를 둘러싼 논쟁이 그저 한 순간의 논쟁으로 소멸되지 않고 운동사회 안에 작은 변화의 씨앗이라도 남기기 위해서는 이 점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 출발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청소년운동의 비판이 탈핵운동에 대한 공격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탈핵운동의 변화에 대한 기대임을 인정할 때, 모든 대안운동이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어 왔던 이야기들을 정치의 중심으로 묶어세우는 운동임을 되새길 때, 청소년운동이 제기한 문제의식이 적대화, 사소화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보호를 필요로 하지만, ‘아이들만’이 보호를 필요로 한다고 사고되는 사회는 위험하다. ‘아이들’은 보호받아야 하지만, 그 보호가 어른이나 전문가에 의해 전유되는 사회는 위험하다. ‘아이들’보다 더 많은 사회적 자원과 권한을 갖고 있는 ‘어른들’의 책임성도 중요하지만, 양식있는 어른들의 책임에 기대 ‘아이들’의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사회 역시 위험하다. ‘아이들’ 보호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삶이 펼쳐지는 모든 장에서 진정한 동등성과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일이다. 평등한 만큼 안전하고 평등한 만큼 자유롭다. 더욱이 동등성과 민주주의의 구현이 대안사회를 꿈꾸는 운동사회 안에서 가장 먼저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쥬리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활동가), 「웹진글로컬포인트」(2014.05.19.)
아마 운동사회에 발을 딛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청소년운동의 존재를 잘 모를 것이다. 혹은 들어는 봤지만 그 운동이 무엇을 목표하고 어떻게 활동하는지는 모른다던가, 대충 알고는 있지만 어딘가 불편하고 동의가 되지 않아 기피하게 되는 운동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공식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자신이나 자신의 조직이 했던 언행에 대해 생각지도 않았던, ‘나이주의적’ ‘청소년 차별적’ 이라는 지적을 받은 경험이 있어 ‘청소년 활동가들은 너무 예민하다’ 거나 ‘늘 다른 운동조직에 문제제기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전 사회적으로 대다수 사람들이 부모-자식 관계든 교사-학생 관계든, 친척이든 이웃이든 어떤 관계로든 주변 청소년과 관계 맺고 있으며, 청소년에 대한 편견과 나름의 ‘지론’을 갖고 있다. 청소년기 이후까지 생존한 인간들은 모두 청소년 시절의 경험과 기억을 갖고 있을 텐데도, 성인이 된 후 그이들과 맺을 수 있는 관계는 상하가 분명하게 나눠진 관계일 가능성이 높아 청소년을 하나의 동떨어진 인간 군상으로 묶어 대체 이해할 수 없다거나 문제적이라거나, 혹은 불쌍하다는, 타자화하는 방식으로 바라보게 되기 십상이다.
청소년활동가는 무엇인가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의 인간답고 동등하게 대우받는 삶을 목표로 하는 운동이다. 청소년활동가는 이 운동에 함께 하는 사람을 뜻하며, 현재의 나이와 관계없이 이 운동에 함께하는 사람은 모두 청소년활동가로 칭한다. 청소년활동가는 나이로 따지면 비청소년일지라도 청소년활동가의 위치에서 청소년의 권리를 주장하기 때문에 청소년 문제와 관련하여 쟁점이 생겼을 때 청소년과 비슷한 대우를 받기도 하며, 나이는 스물이 넘었더라도 청소년활동가로서 발언하는 일이 잦아 남들은 십대이겠거니 당연하게 짐작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모든 운동이 그렇듯 꼭 당사자만이 그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그래서도 안 되며), 청소년운동은 나이주의와 나이차별을 철폐해야 하는 것으로 놓는다는 점에서 나이라는 것의 필연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속성에 따라 나이에 따른 당사자주의는 지양하는 편이다.
청소년 운동이 목표하는 것
이 사회는 나이에 따라 도달해야 할 과업과 하지 말아야 할 금기를 꽤나 엄격하게 정해두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몇 개월 때쯤엔 무엇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십대 때에는 입시에 매진하여 스무 살에 대학에 진학해야 하고, 군대에 가고 취업을 하며 이성과 결혼하고 출산한 후 자식을 잘 키워 은퇴하고 나서는 편안한 노후를 보내는 것이 모두가 바라며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 이상향이다. 나이에 따른 금기는 수도 없이 많은데 보통 ‘어린 애가 감히!’ ‘나잇값을 못 한다’ 등의 평가를 받는 일들이다. 그 중에 청소년에게 금지되는 것은 특히 많을뿐더러 제도적으로도 공식적인 금지와 차별대우를, 많은 경우 ‘보호’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다. 어리기 때문에 판단력이 부재하다는 전제 하에 판매 금지되는 술, 담배와 숙박업소, 밤 10시면 내쫓기는 노래방과 찜질방, 게임 셧다운제, 스마트폰 이용시간 규제, 청소년관람불가 영화와 매체들…….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의 정보접근권과 평등권, 성적 권리, 참여권,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이러한 정책과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보호를 위시하여 금기를 정하고 금기를 어긴 청소년(탈학교 청소년, 흡연하는 청소년 등)을 낙인찍고 차별하는 학교 규칙, 언론, 법 제도에 대한 비판도 이어간다.
청소년운동은 청소년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주되게 문제 삼는다. 학교와 가정에서의 체벌과 학대, 폭언을 비롯한 폭력을 반대하며, 모든 종류의 체벌은 이유를 불문하고 폭력임을 주장한다. 청소년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는 이유로 늘 등장하는 논리는 이들이 미성숙하다는 것인데, 청소년운동에서는 이 성숙/미성숙의 기준과 경계의 문제점, 청소년을 단일한 집단으로 보는 것의 함정, 무엇보다 한 집단에 미성숙하다는 딱지를 붙이고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을 비판한다. 그 외에도 청소년운동은 운동사회를 포함한 사회 전반에서 나이에 관계없이 상호 평등한 관계의 문화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운동사회에서 종종 청소년을 대상으로 행해지는 일방적인 반말, 활동과 뒤풀이에서의 배제, 구호와 문구에서의 청소년 차별과 대상화에 문제제기한다.
청소년의 시민권 또한 청소년운동의 중요한 의제인데, 현재 한국에서는 선거권과 피선거권, 심지어 선거운동을 할 권리까지도 만 19세 이상으로 한정되어 있어 선거권 연령 낮추기/없애기가 청소년운동의 과제이다. 인간답게 살기 위한 생존권, 노동권, 교육권 등 사회권의 문제도 다루고 있으며, 특히 청소년 노동자의 노동권을 지키고 사회적 인식을 전환하기 위한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새롭게 이야기되고 있는 의제로는 원가족을 벗어난 탈가정 청소년의 자립과 주거권이 있는데, 현재 시행되는 일시적인 보호와 원가정 복귀 중심의 가출 청소년 정책을 비판하고 독립적이면서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사회적 지원에 대한 논의가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학교를 진정한 배움의 공간이자 학생이 주체적일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의제는 청소년운동이 가장 주력해왔던 부분이다. 일제고사 반대, 대학입시 거부 등 입시경쟁에 대항하는 운동과, 두발복장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을 의제로 학교 내 학생인권침해에 대응하고 학생인권을 제도화하는 운동, 특히 각지에서 학생인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담은 학생인권조례 제정과 올바른 시행을 위한 운동도 벌어지고 있다. 감시와 처벌 위주가 아닌 인권과 소통의 방식으로 학교폭력을 다루어야 한다는 목소리, 실질적인 학생회의 자치권을 획득하고 학교 운영에 학생의 참여를 보장하기 위한 움직임, 질 좋은 시설과 급식의 보장을 위한 운동도 이어지고 있다.
그 외에도 구체적으로는 정당 내에서 청소년들이 직접 청소년 정책을 만드는 정당 청소년위원회 운동, 학생이 정말 주인인 대안학교를 설립한 운동, 재정적 자원이 열악한 청소년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네트워킹운동, 지역에서 청소년 커뮤니티를 만들고 지역 단위에서부터 변화를 모색하는 운동 등 여러 갈래의 청소년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운동사회에서 청소년이 겪게 되는 일들
청소년에게 기본권과 평등권이 지켜지지 않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미성숙한 아랫사람으로 취급하는 문화가 전제된 사회에서, 사실 운동사회라고 그렇게 많이 자유롭지는 않다. 청소년활동가들이 회의에 참석하면 ‘누구 따라왔니?’ 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성인 활동가들이 일방적인 반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일은 너무 많으며, 설령 대놓고 청소년활동가에게 그러지는 않더라도 중요한 일을 맡기지 않거나(특히 돈과 관련된 일) 업무에서 은근히 배제하는 분위기는 팽배하다. 뒤풀이가 술자리로 열리면 청소년활동가들의 참여를 막거나 눈치를 주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공식적인 음주가 포함된 행사에서는 아예 대놓고 청소년 입장 불가를 써 붙이기도 한다. 2008년 FTA와 광우병소고기 수입 반대로 촛불의 열기가 올랐을 때는 집회 주최 측에서 10시 이후 청소년들의 귀가를 ‘요청’하기도 했다.
최근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는 녹색당과 환경단체들이 지속적인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이들에게 핵 없는 세상을’이라는 문구를 사용해온 것에 대해 규탄하는 성명을 내었다. ‘‘아이들’은 ‘여러분’과 함께 핵 없는 세상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을 품은 이 성명에 많은 논쟁이 오갔다. 아이들을 대상화한 보호주의적 언행이 아니라 탈핵운동의 특성상 미래세대를 바라보기 때문이라는 항변부터, 아수나로의 성명이 ‘일률적인 평등 주장’이라는 비판을 담은 글이 기고되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 운동단체에서 이런 아동, 청소년의 존재를 자신의 의제를 위해 대상화하여 활용하는 예는 수없이 많다. 서울 학생인권조례가 시의회에서 통과되기 전 조례 안의 성소수자 권리 관련 조항들이 논란이 되며 삭제될 위기에 처하자 성소수자인권운동에서 사람들의 지지와 결집을 모으는 홍보물에 ‘내 새끼 구출작전’이라는 문구를 넣었다. FTA든 국정원이든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는 의제가 만들어질 때면 늘 ‘우리 아이를 위해’하는 구호가 등장하며, 촛불집회 때면 촛불을 든 어린이의 얼굴은 늘 클로즈업 되어 사진이 찍힌다.
사실 아동, 청소년이 탈핵을 외치고, 성소수자의 인권을 주장하고, 촛불집회에 나가는 것이라면 전혀 문제가 아닐뿐더러 집회 결사와 정치적 주장을 할 수 있는 이들의 권리가 그만큼 보장되고 있다는 것, 혹은 그러한 권리 보장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주체들이 있다는 점에서 매우 긍정적일 것이다. 투쟁의 이유가 오로지 ‘나’ 때문인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며, 그것이 인류나 자연에 대한 사랑이든, 혹은 가까운 사람들과 더 나은 세상에서 살고 싶은 열망이든 소중한 마음이다. ‘우리 아이들’을 위한다는 식의 선전이 투쟁의 효과를 높여주는 면도 있겠다. 하지만 문제는 이 나이 적은 주체들이 다뤄지는 방식이 ‘대상화’이며, 그 관점은 ‘보호주의’적이고, 이들을 절대 함께 투쟁하는 동등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를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아이가 아닌 이들 뿐이다.
억압의 고리가 되고 싶지 않다면
나는 태어난 지 열여섯 해가 지난 후 즈음 운동을 시작했고, 지금은 열아홉 해를 살았다. 매일 체벌이 일어나고 신발과 가방, 양말 색깔까지 규제하며 교사는 학생에게 모욕감을 주는 언사를 서슴지 않는 학교를 다녔었고, 나 자신을 이렇게 부당한 인권침해에 방치할 수 없다고 결론짓고 중학교를 자퇴한 후, 내가 학교와 사회에 가진 불만을 공유한 이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억압받는 사람이 그 억압이 부당하다는 걸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가고, 그것을 통해 행동하고, 함께 행동할 사람을 만나는 건 유난히도 행복한 일이다. 아마 다들 이렇게 운동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곧, 운동사회도 바깥의 이데올로기와 억압구조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비슷한 지향을 갖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조차 내가 받는 억압에 일조하는 위치에 설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운동사회에서 청소년활동가들이 다른 조직들의 나이주의적이고 청소년을 차별하는 문화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본인이 속한 공동체를 더 나은 곳으로 바꾸기 위함이고, 이른바 대 사회 투쟁을 하기 위해서도 운동사회 내 문제의식의 공유와 문화의 변화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운동사회 내 지속적인 청소년활동가 재생산을 위해서도 청소년인권친화적인 문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소수자를 배제하지 않는 조직문화를 만들고 운동을 할 때 그 시선을 유지하는 것은 어떤 운동에게나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를 억압하는 족쇄들은 얽혀있고, 우리 안에도 다양한 층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운동조직들이 문제제기를 잘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무조건 거부하고 듣지 않으려는 곳도 있고, 그저 절차적으로 듣고 처리해버리는 곳도 있다. 청소년 차별이나 나이주의와 관련하여 문제제기를 하면 돌아오는 반응들은 ‘정치적 올바름의 잣대를 과도하게 들이댄다’ ‘이미 사회구조가 이런데 우리만의 잘못이냐’ ‘형식(기계)적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냐’ ‘근데 문제제기를 하려면 예의 있게 해라’ 등이다.
어떤 것은 당연하고 필요하다고 여겨지지만 어떤 것은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으로 여겨진다. 청소년활동가들은 청소년 인권의 문제가 당연하고 필요한 것이 될 수 있도록 투쟁한다. 사회구조가 이미 그런데 사실 그 조직이나 사람만의 문제는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 사회구조를 이루는 것은 공동체와 개인들이며, 자신이 운동의제로 삼는 어떤 당사자들만이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니라 모두 함께 살기 좋은 세상을 꿈꾼다면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청소년활동가들은 형식적 평등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들이 문제제기하는 그 문제가 그저 ‘형식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면 왜 그 많은 감정노동과 위험을 무릅쓰고 문제제기를 하게 되었을까 생각해보자. ‘문제제기를 하려면 예의 있게 해라’라는 말은 여러 변주로 청소년활동가들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반응인데, 이건 스스로가 청소년보다 우위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걸 증명해 보이는 말이다. 문제제기를 할 때조차 예의 있기를 요구받는다면 이건 문제제기의 원인이 된 사건보다 실제가 더 심각한 상황임을 드러낸다.
청소년활동가임을 밝히면 종종 ‘그런데 청소년활동가들은 왜 그렇게 공격적이냐’는 질문을 받는다. 청소년운동이 어떤 방식의 전략을 택할 것인지, 문제의식을 어떻게 보다 효과적으로 전할 것인지는 분명 고민해야 할 문제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하게 되는 맥락을 생각해보면 문제제기를 하겠다는 결정은 누구에게나 결코 쉽지 않다는 걸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문제제기를 고민하게 되는 상황은 문제의식이 공유되고 있지 않은 때일 텐데,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는 견디기 힘들겠다는 판단, 혹은 운동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에 해야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고, 문제제기를 하고 난 후 내가 이곳과 다시 함께 잘 운동할 수 있을지, 이 공간에서 나의 위치는 어떻게 될 것인지, 누가 나의 문제의식에 공감할지를 머리 싸매고 계속 고민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을 생각하여 문제의식을 전달하고, 자신이 한 문제제기가 한동안은 매일 스스로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때로는 마음까지 갉아먹는 문제가 된다. 청소년활동가들은 이런 과정 없이 쉽게 문제제기를 할까? 아니다.
어느 조직에서나 청소년 차별, 나이주의와 관련된 문제는 발생할 수 있다. 단체의 공식적인 구호나 입장에서는 청소년인권친화적인 요소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회원이나 활동가 간에 있을 수 있는 문제들은 누군가가 고민한다고 해서 완벽하게 방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신이 청소년과 나이주의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면, 자신이 활동하는 조직에서부터 한 번쯤 청소년인권 교육을 다 같이 받아보고, 내규를 제정할 때 청소년이 활동하기 편한 조직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해보고, 평소에 청소년 인권의 중요성을 동료들에게 설득하는 작업은 해 볼 수 있다. 청소년활동가들은 청소년운동조직이 아닌 다른 조직에서 활동할 때 이 문제에 관해 혼자 고민하고 혼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고립감을 자주 느끼기 때문에, 이런 실천들은 분명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문제제기를 받았을 때는, 문제제기를 한 당사자가 겪었을 과정과 마음을 한 번만 더 헤아려보자. 공격이 들어왔다고 여기는 게
아니라, 이 조직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투쟁할 수 있도록, 이 조직에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문제 해결이
필요하다고, 그렇게 한 번 생각해보자. 그렇게 하면 되냐고? 너무 나이브한 것 아니냐고? 투쟁이란 게 싸움을 동반할 때도 있다는 건
안타깝지만 현실이다. 하지만 본디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었을, 어떤 측면에선 더 풍족하고 편한 삶 대신 운동을 하기로 결정했을
때의 마음을 생각해보자. 그 마음은 청소년활동가들의 마음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이응이(청소년활동가), 「인권오름」 (2014.05.29.)
[평등하게 추모하고 평등하게 싸운다]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구호를 성찰하기
반갑습니다. 저는 청소년활동가 이응이라고 합니다, 처음 세월호 참사 소식을 접했을 때 너무 충격을 받았고 충분히 살 수 있었던 사람들이 어이없게 죽어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니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더 많은 승객을, 더 많은 화물을 싣기 위해 낡은 배를 증축하고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승무원들을 비정규직으로 고용했고, 침몰당시 사람들을 구조하는 것보다 높으신 분들 ,돈 있는 분들을 모시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고 저 또한 언제든 또 다른 세월호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고도 생각했고, 이미 세월호의 또 다른 당사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위 사진:](http://sarangbang.or.kr/bbs/skin/_photo/transparent_border/up_arrow.gif)
다시는 이런 식으로 돈 때문에 사람들이 죽지 않게, 아직 살아있는 우리가 우리 손으로 바꿔야한다고 생각해서 여기 나왔습니다. 여기에 계신분들도 그렇게 생각해서 모이신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곳에 오면서, 또 세월호 관련 활동들을 지켜보면서 참 많이 보고 들은 것 같은 말들이 있습니다. '착한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아이들을 살려내라' '어른들이 세상을 바꿔낼게' 등과 같은 구호들입니다. 희생된 학생들을 어른들이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학생들이 죽기 전에 세상을 바꾸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이제라도 희생된 학생들 대신 어른들이 세상을 바꿔주겠다는 내용을 담은 구호들이라고 생각됩니다.
스스로 싸워서 이런 현실을 바꿔나가야 하는 건데 아이들 대신 어른들이 지켜준다는 말은 주체가 객체에게 하는 말이고 그 당사자인 '아이들' 스스로 지칭할 수 없는 말입니다. 누가 누구를 위해 대신 싸워주는 게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데 이 구호를 쓰면 그럴 수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구호는 학생이 아닌 희생자들을 밀어내게 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번 참사에서 먼저 말씀드렸던 구호들을 쓰면서 학생이 아닌 희생자들과 유가족분들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살아있는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아이들'에게 반말로 사과를 하는 일이 아니라 다시는 이런 참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스스로 싸우는 일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평등한 싸움을 통해 우리가 바꿔냅시다.
* 이 글은 5월 18일 청와대 만민공동회 때 발언한 내용입니다.
공현(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회원), 「건강세상네트워크 웹진 Health Watch」(2014.05.30.)
안전을 권리로 생각하기 - 학생인권과 안전
다시, 안전이 화두다. 과거에도 ‘학생간 폭력’(통칭 ‘학교폭력’)이 이슈가 되었을 때, 아동에 대한 성폭력이 이슈가 되었을 때
등, 조금씩 다른 맥락에서, 그러면서도 주기적으로 학생의 ‘안전’은 수면 위로 떠오르곤 했다. 그리고 다시 세월호 참사. 커다란
사고와 비극 앞에서 사람들은 다시 안전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마주한 사고가 너무나도 압도적이기 때문일까. 안전 교과
신설, 수영 교육 강화, 수학여행 금지, 쏟아져 나오는 여러 가지 대책들은 어딘지 공허해 보인다.
안전, 중요하지만 망설이게 되는
안전할 권리는 분명 인권 중에서도 아주 중요한 권리이다. 안전할 권리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생명권도 건강권도 위협받게 될 것이다.
넓게 보면 안전할 권리란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부터 위험에 대한 예방 조치를 받을 권리, 그리고 안전하고 건강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까지 포괄하는 것이다. 자유권의 영역과 사회권의 영역 모두에 걸쳐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안전’이라는
단어는 학생인권의 보장을 바라며 활동하는 사람들이 흠칫, 거리를 두고 이야기하기 망설이게 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안전’이라는 개념을 학생인권을 제한하고 약화시키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해온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서
학교 곳곳에 감시카메라(CCTV)를 설치해야 한다.”,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서 소지품 검사를 해야 한다. 혹시 누군가가 위험한
물건을 가져왔을 수도 있다.”,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서 학생들을 학교에서 밤늦게까지 공부시키는 것(야간자율학습)도 괜찮다.”
안전. 보호라는 말로도 바꿔서 쓸 수 있는 이 말이, 때로는 폭력이나 억압을 정당화하는 핑계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경험해봤다. 많은 감시와 통제, 국가폭력 등이 안전(치안)의 이름을 앞세워 이루어진다. 이런 안전은 우리의
권리라기보다는 국가의 명분이다. 이때 국가는 안전을 책임지고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의무를 다하기보다는, 무엇이 안전의 문제인지
결정하고 베풀 권력을 가지게 된다. ‘내(국가, 학교, 경찰)가 너희를 보호하고 안전하게 해줄게. 내 말에 복종해.’ 게다가,
‘안전’은 생명권과 연결되기에 힘이 세다. 일단 다치지 않고 죽지 않고 봐야지 다른 인권도 보장될 수 있지 않느냐는 이야기 앞에
많은 권리들이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권리인 듯 권리 아닌 반쪽짜리 ‘안전’
‘권리 아닌 안전’이 가지는 한계는 명백하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안전 문제의 대상을 선별적이고 편파적으로 정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가정에서의 폭력 때문에 집을 뛰쳐나온 청소년을 가정해보자. 경찰 등은 이 청소년을 가정에 돌려보내는 것이 그의
‘안전’을 위해 우선적으로 취해져야 할 조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청소년의 입장에서 가정은 안전한 공간이 아니라 목숨과
신체가 위협당하는 공간일 뿐이다. 실제로 얼마 전 내가 만난, 친권자의 폭력 때문에 집을 뛰쳐나온 어떤 청소년은 집으로 돌아가면 뼈
정도는 부러질 것 같다고 심각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세간에서 주로 말하는 ‘안전’ 속에는 그처럼 일상적인
폭력의 문제들이 상당 부분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학교도, 가정도. 학생이 아픔을 호소해도 병원에 가도록 하기보다는 꾀병을
의심하고 학습을 강요하는 학교는 과연 안전한 것인가? 애초에 밤늦게까지 공부를 시키는 학교나 학원도, 과로 등으로 학생의 건강을
해치고 있는 위험한 곳 아닌가? 이는 안전의 문제를 당사자의 입장에서 판단하고 정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고, 힘을 가진 다른
누군가가 대신 판단하고 결정하려 하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한계이다.
다음으로, 안전을 권리로 생각하지 않을 때
우리는 안전을 위해 삶을 파괴당하는 역설을 겪게 된다. 영화 『데몰리션맨』 속에서는 안전을 위해서 삶의 모든 것이 감시당하고
정부에 의해 통제당하는 미래 사회를 묘사한다. 그 사회는 욕설 한 마디만 해도 바로 벌금 통지서가 날아들지만, 뒤집어 보면 그
사회는 욕설 한 마디를 할 자유조차 없는 사회이다.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상상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을 보라. 안전을 위해서 감시카메라(CCTV)를 달고, 안전을 위해서 게임을 셧다운하고, 안전을 위해서 수학여행을 금지하고
있다. 태안 해병대 캠프 사고가 난 후 국가가 안전을 위해 내놓은 방안은 청소년들의 수련활동을 정부에 사전신고해야만 할 수 있게
바꾸고 국가의 인증을 받지 못한 활동은 학교에서 갈 수 없게 하는 것이었다.
안전을 보장하는 방법이 온갖 것들을
금지하고 국가가 허가한 것만이 존재하는 단조로운 온실 안의 삶을 사는 것이라면, 그 안전이 보호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행복하고 좋은 삶이 아니라 그저 살아있기만 한, 생명만을 남겨두는 것이 과연 안전인가?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것은 아닌가? 단지
살아있기만 하면, 우리는 안전한 것인가? 우리가 안전을 바라는 목적은 안전한 가운데서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안전할 권리를 되찾자
▲ 해병대캠프 사고가 났을 때 청소년단체들은 학생 당사자의 참여 보장 등을 요구에 포함시켰다.
청소년들이 위험한 명령을 좀 더 자유롭게 거부할 수 있는 사회였다면 사고를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사진 출처 : 교육희망 최대현 기자)
다시 세월호 참사로 돌아와보자. 나는 이 사건이 그 자체로는 ‘학생인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권’의
문제이기는 하다. 국가는 배의 과적을 단속하지도 못했고, 안전하게 설계된 배만 운항하도록, 배의 책임자들이 제대로 안전교육을 받고
위급할 때 대처하도록 책임지지도 못했다. 사고가 난 직후에도 국가는 인명을 구조하는 데 무력했다. 세월호 승객들의 안전할 권리는
전체적으로 보장받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국가는 지금 수학여행을 금지하고, 안전교과를 신설하겠다고 하며, 세월호를 운항한
청해진해운 그리고 해경을 희생양으로 올리려 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잘못했고, 처벌을 받고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사태 해결
방법이 안전을 개인의 몫으로 돌리거나(수영교육 강화, 청해진해운 악마화 등) 사람들을 억압하는 형태의 해결책(수학여행 금지)으로
귀결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전을 권리로 생각해야 한다.
안전을 우리의 권리로 가져온다는 것은
각자도생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안전할 권리를 보장하도록 국가에게 적극적으로 의무를 지운다는 의미이다. 학교로 이야기하자면,
안전을 위해서 달리지 말라고 윽박지르고 감시하는 학교가 아니라, 달리다가 넘어져도 크게 다치지 않고 툭툭 털고 일어나서 더 잘
달릴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들고 안전 장비를 챙겨주는 학교가 더 낫지 않은가? 넘어져서 좀 다쳐도 누구나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학교를 만드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사고의 책임을 지시를 따르지 않은 학생에게 돌리기보다는 사고를 예방하고 그 피해를 함께
분담하기 위한 시설과 제도를 만드는 학교가 훨씬 안전한 학교가 아닌가? 수학여행을 금지하는 정부가 아니라,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하든 안전을 담보할 수 있도록 시스템과 환경을 만들고 학생들이 여행을 즐길 수 있게 하는 정부를 만드는 것. 그것이야말로
‘안전할 권리’의 적절한 행사 방식일 것이다.
권리로서의 안전은 다른 인권과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롭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기회를 가질 수 있을 때 더 안전해지며, 차별이나 폭력에 의해 침묵을 강요당하지 않고 평등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때 더 안전해진다. 안전을 위해서는, 불합리하고 위험한 상황과 명령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고 회피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
안전이고 무엇이 위험인지, 평등하게 참여해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권력자의 편의나 이윤보다 안전을 위한 조치를 우선적으로
취하라고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안전을 국가나 치안 권력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권리로 찾아올 것을 꿈꾼다. 그리고 그것이
학생인권이 안전을 추구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일 듯싶다.
공현(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회원), 「한겨레」 (2014.05.18.) (저작권 문제상 원문링크 표시)
학교는 규칙 준수와 질서를 강조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학교에서는 규칙이 무시당하고 힘센 자의 입맛대로 적용되는 일이 더 많았다. 최근에도 그리 다르지 않다. 수원에서 열린 한 청소년 토론회에서는 드럼 스틱으로, 하키 채로 체벌을 당하고 있다는 증언이 나왔다. 차별이나 학교폭력을 신고했지만 묵살당한 일 등 사례도 쏟아졌다. 법령으로 체벌이 금지된 지 3년, 그것도 학생인권조례 시행 4년차인 경기도의 이야기다.……
배경내(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한겨레21」 노땡큐 연재 (저작권 문제상 원문링크 표시)
애들은 가라? [2014.04.14. 한겨레21 제1006호]
오늘날 우리가 가진 ‘아이다움’에 대한 관념과
아동기에 부여된 발달 과업이 근대에 형성된 역사적 산물임은 제법 알려져 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조선시대 윤리는 당시
사람들이 일곱 살을 성적 실천이 가능한, 몸집만 작을 뿐 성인과 다름없는 존재로 바라보았다는 증거다..……
온전한 애도 [2014.05.26. 한겨레21 제1012호]
‘어른들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아이들을 살려내라’라는
표현은 또 어떤가. ‘아이들’을 희생으로 내몬 ‘타락한 어른들’을 제어하지 못한 ‘어른 일반’에게 도덕적 책임을 묻게 되면,
정치적 책임보다 어른의 복원이 더 중요한 과제가 되어버린다. 어른들이 각성할 문제가 되는 순간, 살아 있는 ‘아이들’은 침몰하는
배에서의 주문처럼 다시금 ‘가만히 있음’을 강요받게 된다. 장차 ‘아이들’에게 어떤 사회를 물려줄 것인가,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가 중요해질 뿐, 지금 당장 ‘아이들’에게 어떤 정당한 자리를 보장할 것인가의 문제는 뒷전으로 물러나기
때문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