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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들

[27호][관점들] 《걸 페미니즘》 독후감

27호 [관점들] 에는 《걸 페미니즘》 독후감을 싣습니다. 27명의 청소년페미니스트들이 자신이 겪었던 여성혐오와 청소년혐오, 교차하는 억압에 관해 쓰고 담았습니다. 독후감은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에서 활동하고 있고 활력소 제작에 함께하고 있는 윤달님이 써 주셨습니다.

 

《걸 페미니즘》, 양지혜 외 씀, 2018, 교육공동체 벗, 15,000원

 

 

 

모순. 나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온갖 모순된 요구를 받으며, 온갖 모순된 욕망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만큼 나의 욕망에 집중하며 살아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받는 요구와 나의 욕망이 서로 모순되었을 뿐인 게 아니라, 요구도 모순되었고, 욕망도 모순되었다. 여러 갈래의 길을 한꺼번에 걷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이 책의 저자들은 그 모든 것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끊임없이 저항하며 나다운 모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그런 27명의 이야기가 한 권의 책에 담겼다. 수많은 책들 중 청소년페미니스트가 청소년인권과 페미니즘에 대해 쓴 책은 이 책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청소년인권활동가이자 페미니스트인 나에게 각별하고, 소중한 책이다. 아주 유일하고도 다양한 경험이 수두룩 있어 어떤 독후감을 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글쓰기를 시작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32개의 글 중 부끄러운 것이라고 지워졌던 나의 욕망이라는 글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려 한다.

 

내가 자위를 시작한 건 12살 무렵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모두가 성에 대해 딱히 말하지 않는 분위기였는데, 중학교 때는 조금 달랐다. 서로 자위를 얼마나 하는지, 어떻게 하는지를 이야기하면서 키득거리고 놀았다. 물론 그들이 나를 다시 헤픈 애로 납작하게 눌러버릴 것을 알았다. 많이 두려웠다. 온전히 말할 수 없음을 느꼈다. 그럼에도 그것을 깨는 것 또한 즐거웠다. 금기를 깨는 기분. 동시에 그때의 나는 꾸준히 페미니즘을 공부했고 세상의 온갖 성차별에 대해 목소리 내기를를 당연하게 여겼다. 어느 시점부터 나는 메갈이 되어 있었고 정도가 심해지자 선생님이 남자애들을 모두 데려가 따로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들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모르는 채로 조금은 안심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자애들은 “쌤, 걔 보기보다 완전 변태예요. 저한테 몽정했는지 물어보고 그랬어요.” 같은 얘기를 했다는 걸 엄마를 통해 알게 되었다. 엄마는 그때 “네가 정말 그랬던 게 맞아?” 하고 물었던 게 기억에 남는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감정은 외로움이었다.

 

그 일이 있었던 지 한 해가 지나고 이 책을 읽었다.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모습을 보며 1년 전의 나와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쟤는 너무 밝혀.’ ‘남혐하니?’ ‘쿵쾅쿵쾅.’ 같은 것뿐이 아니다. ‘여자애 다리애 멍이 왜 그리 많니.’ ‘어유, 칠칠맞아. 시집가고 나서도 이러면 안 된다 얘.’ ‘딸바보 아빠한테 좀 잘해줘.’남자애들은 원래 그래. 그래도 고등학교 가면 나아질 거야. 아직 철이 안 들어서 그래. 네가 너무 성숙하기도 하고. 그러니 네가 조금만 이해하렴. 나도 힘들다.’ ‘너는 너무 너만 생각해. 좀 이타적인 사람이 될 순 없니?’ 책을 읽으며, 평생을 걸쳐 내가 겪어 온 모든 억압을 설명하기 위한 언어를 찾아갔다. 그들은 나의 삶과 몸과 이야기를 내 목소리로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내가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말해본 적이 없다. 내 주위 여자 친구들도 말하지 않는 영역이었고 부모님과도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다. 학교 성교육 때도 들어본 적이 없다. 10년 넘게 ‘자위’라는 단어를 입 밖에 꺼내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 헤픈 년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남들에게 ‘밝히는 소녀’가 되고 싶지 않았고 나의 욕망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성은 성욕이 없어야 했으니까.” - 53쪽

 

저자들이 말하는 두려움과 어려움에 깊이 공감하며 책장을 넘겼다. 각자의 경험은 다르고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느껴야 했던 두려움은 닮아 있었다. 나와 닮은 두려움을 가진 여성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꽤나 커다란 위로가 되었다. 여성청소년이라서 할 수 없었던 또는 해야만 했던 모든 강요와 억압들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는 것만으로 커다란 에너지를 들여야 한다. 그런 속에서, 지금도 여전히 살아가고 있을 페미니스트들에게, 페미니즘으로 연대해주어 정말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읽어 나가는 순간마다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 글: 윤달(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