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관점들

[26호][관점들] 고등학생운동 간담회를 다녀와서

26호 [관점들]에는 활기 활동 등을 함께하고 있는 조영선의 《인권을 만난 교육, 교육을 만난 교육 - 교사를 위한 학생인권》(2020, 교육공동체 벗)에 대한 리뷰와 2019년 11월 있었던 고등학생운동 관련 간담회 후기 기사를 싣습니다.

2019년 11월 29일, 서울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그때 우리는 학교와 정권에 맞서 싸웠다 ― 8090 참교육운동을 했던 학생들의 이야기마당’이 열렸습니다. 행사를 함께 준비하고 참석한 목성돼지님의 후기입니다.

 

 

 

 

 

2019년 11월 29일, 서울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그때 우리는 학교와 정권에 맞서 싸웠다 ― 8090 참교육운동을 했던 학생들의 이야기마당’이 열렸습니다. 전교조 교사 해직 반대운동 30주년을 맞아 자주적 학생회, 입시경쟁 철폐, 전교조 교사 해직 반대를 외치며 나섰던 중고등학생들이 있었음을 이야기하고, 그 당시 행동했던 사람들과 지금 행동하고 있는 청소년과의 만남을 이루기 위한 간담회였습니다.

조한진희, 정용주, 양돌규, 안수찬, 김영희 님이 고등학생운동의 경험을 들려주셨고, 이수경 님은 현재 학교 안에서 학생인권운동을 하면서 교사와 연대했던 경험을 이야기해 주셨답니다. 청소년인권운동 아수나로 서울지부와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준)이 공동 주최했으며 공현 님이 기획하고 저와 밀루 님이 준비를 함께했습니다. 당시 참여하지 못한 분들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이렇게 기고합니다.   

- 목성돼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역사에 관심이 많은 청소년 활동가라 고등학생 운동과 현재 청소년운동이 만나는 자리를 기획한다고 했을 때부터 참여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함께 준비를 맡게 되었지만 솔직히 걱정도 되었다. ‘고등학생운동’이라는 이름부터 왠지 청소년운동보다는 대학생들의 ‘학생운동’과 가까운 느낌이었고, 지금껏 단편적인 정보들만 들었을 때는 과연 서로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을지, 감수성이 맞닿을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30년의 시간을 넘은 강한 연결고리를 느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크게 다가왔던 연결고리는 운동이 처한 어려움과 실패의 경험들이었다. 패널들은 당시 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겪었던 학교에서의 징계, 가정에서의 폭력 경험을 털어 놓았다. 일부 패널들은 당시 미숙함으로 인한 시행착오와 탄압에 괴로워하던 동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 등을 겪으며 당시의 경험을 기억하기 싫은 부끄러운 실패의 경험으로 여기게 되었다고도 했다. 

 

“고등학생 운동의 경험은 개인차이가 있겠지만 가급적이면 잊어버리려고 애를 쓰는 기억입니다. 반갑기도 했지만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들려드려야 할까 고민도 되고요. (……) 저는 직선제 학생회 담당을 맡았습니다. 상태가 그나마 괜찮은 학교의 학생들 만나면서 직선제 학생회 만나자고 설득하는 게 일이었죠. 경화여고에서도 직선제 학생회를 만들었고, 김수경 씨도 멤버 중에 하나였습니다. 김수경 씨는 그해 90년 6월에 직선제 학생회가 만들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학교, 학부모, 지역 정서 등에 의해서 탄압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런 일들 한가운데 어딘가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대구에서는 선생님, 부모님, 장학사 삼위일체를 이루어서 저희를 압박했어요. 아버지가 학교로 와서 때리고 학생주임이 오고 장학사가 와서 보고... 그 모든 인연으로부터 탈출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집 나와야 하는 거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말씀드리면 당대의 미디어 보도가 아니더라도 나중에라도 후일담으로 조명받을 수 있거든요. 대학생운동, 전대협 등등 시절에 그들, 대학생들의 시위도 운동도 당시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된 적이 없었어요.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처음에는 후일담의 방식으로, 문학이던 영화던 언론을 통해서던 확산되었다고 생각하는데. 89~91년으로 이어지는 운동을 했던 고등학생들은 실패담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 (함께 활동했던) 친구들 사이에서도 좋은 기억을 갖고 있지 않아요.”  - 안수찬


청소년운동이 처한 열악함은 물론 그 수준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30년 동안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못했다. 청소년은 경제적, 제도적으로 가정과 학교에 묶여 있는 경우가 많고, 결국 청소년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말하는 운동을 한다는 것은 학교, 경찰, 가정에게 전방위적인 압박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경험과 어려움들은 30년이라는 시간의 격차를 넘어 생생하게 다가왔다. 지금보다 한층 더 심각했던 탄압을 들을 때는 눈물을 글썽이게 되었다. 학교 안에서 공개적으로 대자보를 붙이기 어려워 아무도 없는 새벽에 몰래 학교로 들어가 대자보를 붙이고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는, 동료들과 대자보 붙이기를 함께 준비하며 어떻게 들키지 않고 붙일 수 있을지 고민을 나눴던 시간들과, 학교에서 대자보를 붙였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았던 수많은 동료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공감대는 단순히 피해와 분노의 기억들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점차 운동을 하며 지녔던 고민들과 의제들에까지 공감의 폭이 커졌다. 언론 기사나 시민사회 행사에서 고등학생운동이 등장할 때면 대부분 ‘전교조 교사 지키기 활동’이 회자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가장 대중적으로 퍼졌던 고등학생 운동의 구호와 의제 중 하나가 부당하게 해직을 당한 전교조 교사를 구명하는 활동이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실제 고등학생운동을 진행했던 활동가들은 1989년의 이전과 이후에도 체벌, 보충·야간자율학습 폐지, 표현의 자유, 학생자치 등 다양한 의제들에 대한 주장과 행동을 펴 나갔다. 그러기 위해 지역별로 학생들을 조직하고 정치적인 세력이 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것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해 온 주장과 행동들과 닮아있었다. 이러한 운동이 비슷한 시기의 대학생들의 운동에 비해 거의 기억되거나 주목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하고 안타까운 마음 한편에 이 역사를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청소년운동의 책임도 무겁게 다가왔다.

 

“전교조 30주년이 되었지만 고운을 기억하지 않고 독자적인 무언가 하지 않는 것은 십대를 주체로 보기 불편해하는 흐름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돈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그럼 누가 고운의 기억을 소환해야 하는가 했을 때 오늘 보다시피 청소년운동이 (해야 하는 것이죠). 고운을 전교조 투쟁의 일부로 기억하는 것에 대해 전 생각이 다른데요. 저희 학교에는 전교조 교사가 없었거든요. 지난달 우연히 당시 고등 선생님을 만났었는데 저희 학교가 첫 부임이었던 20대 교사였어요.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대학교 때 야학 교사도 했지만 사회운동을 하지는 않았다. 너희들이 학내에서 투쟁하고 탄압당하고 학교를 잘리고 그런데도 계속 투쟁하는 걸 보면서 오히려 내가 사회운동에 대해서 눈 뜨고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얘기를 했거든요. 그래서 고등학생운동을, 전교조 교사들을 지지하는 학생 모임처럼 말하는 건 축약된 역사, 또는 의도적으로 왜곡되는 역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한진희
“선생님 지켜주기 운동으로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주요하게 활동했었던 건 (달랐어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고등학생 정치 세력화 공동실천위원회 지역별 조직이 있었는데 전국 조직과 네트워크 만드는 걸 했었고. 고등학생 운동의 방향이 선생님 지켜주기나 학내민주화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독자적인 (중고등학생들의) 정치 세력화를 어떻게 만들어낼 거냐 하는 것도 있었고요.” - 정용주

 


단순히 교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교사 운동의 부차적인 운동이 아니라, 우리보다 앞서 운동의 주체로서 청소년을 치열하게 사유했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도달하자 30년을 지나 우리를 연결해주는 고리의 존재를 확실히 인지할 수 있었다. 그 사람들은 우리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유사한 고민을 하였으며,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아픈 이야기들이 많이 나왔지만 그 이야기들이 마냥 아프게만 전달되기 보다는 묘한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나와 비슷한 아픔을 겪고 유사한 고민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지를 받는 기분이었다. 청소년운동과 청소년운동 활동가들은 특수한 시기의 유별난 운동이나 사람들이 아니었다. 잘 기록되지 않았고, 주류에서 멀었을 뿐이지 오랜 시기에 걸쳐 지속되고 있는 운동이었다. 나는 고등학생운동의 활동가들을 처음 만나지만 그들의 운동과 주장은 나에게 이어져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한결 마음이 편해짐과 동시에 든든해졌다. 왜 내가 이 자리에 왔어야 하는지를 이 자리에 오고 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차별받는 청소년에 분노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다. 당장 나의 활동이 잘 되지 않더라도 우리들은 꾸준히 나아갈 것이고 연결될 것이며, 운동은 이어질 것이다. 

 

- 글: 목성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