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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들

[26호][관점들] 인권을 만난 교육, 교육을 만난 인권

26호 [관점들]에는 활기 활동 등을 함께하고 있는 조영선의 《인권을 만난 교육, 교육을 만난 교육 - 교사를 위한 학생인권》(2020, 교육공동체 벗)에 대한 리뷰와 2019년 11월 있었던 고등학생운동 관련 간담회 후기 기사를 싣습니다.

책 리뷰는 SNS를 통해 리뷰를 쓸 사람들을 공개 모집하는 새로운 시도를 해 보았습니다. 청소년인권운동 활동가가 아닌 여러분들이 공개 모집에 응해 주셨습니다. 세 분이 쓴 책 리뷰를 싣습니다.

 

 

 

 

[1] 학생의 문제 행동은 오로지 학생의 책임인가
 
'청소년활동기상청 활기'를 통하여 조영선 저자님의 신간인 《인권을 만난 교육, 교육을 만난 교육》을 감사하게도 읽을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조영선 저자께서는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시며 펜을 들고 계신다. 저서로는 《학생인권의 눈으로 본 학교의 풍경》 등이 있다. 대개 교육적인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가 가장 인권적인 장소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인권을 만난 교육, 교육을 만난 교육》은 그러한 아이러니에 답을 준다.

 

혹자는 요즘 학생들은 학생 같지가 않다고 이야기 하곤 한다. 그러고 나서 “나 때는 말이야”를 시전한다. 저자도 역시 교사로서 학생들의 용모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말하는데, 우리가 이렇게까지 학생들의 머리와 복장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그 기원을 일제강점기 시대라고 이야기한다. 1930년 민족말살정치가 행해지던 시대, 우리는 하나의 지식인이 아닌 황국신민으로 거듭나기 위해 복장과 두발 형태 등을 제어받아 온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가끔 외국에도 학생인권조례가 있는가에 대해 질문을 받는다고 한다. 하지만 외국에는 학생인권조례가 없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들은 인권 감수성이 부족한 것인가? 정답은 그렇지 않다. 인권 감수성이 너무 넘쳐 인권조례가 따로 필요 없는 것이다. 한국의 학생들만 자신의 개성을 표출할 권리를 ‘선도’라는 명목하에 뺏기는 것 같아 정말이지 안타깝다.

 

또한 교사들은 ‘수업방해’, ‘교사의 정당한 지시 불이행’을 이유로 학생들을 ‘교권침해자’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저자는 교권침해가 국정 감사 기간에 수업 내용을 보고하라는 공문을 받는 등 교육 활동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주체들의 행위가 아니라 주로 학부모와 학생에 의한 행위로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표한다. 그리고 학생들의 문제행동은 어떤 일탈 행위라기보다는 그 순간에 일어나는 배움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 학습권을 포기당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상황에 대한 교사들이 고려해야 할 조건들을 제시한다. 그 조건들은 이러하다. 학생과 교사 모두에게 문제라고 생각되는 상황인가, 학생들이 어떠한 욕구로 그러한 행동을 했는가, 구조적인 문제는 없는가, 어떻게 학생들이 소속감과 기여감을 가지게 할 것인가. 단지 단편적인 문제 행동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 이면의 다른 상황을 고려하는 것이다.

 

경기도에서는 학생인권조례가 결실을 맺은지 올해로 10년이 된다고 한다. 2020년 현재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어있는 광역시·도는 경기도, 서울특별시, 전라북도, 광주광역시이다. 2019년 경남에서도 진보 교육감 아래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는가 했지만 보수적인 교육위원회에 의해 부결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학생인권조례안을 수정과 같은 조치 외에 그저 부결시켰다는 것은 학생을 인권의 주체로 보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이 된다. 가르치는 교사와 배우는 학생뿐만 아니라 모두가 가장 인권적인 것이 가장 교육적임을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 글: 박관희

 

 

 

[2] 교권이 먼저인가 학생인권이 먼저인가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대한민국에서 18살 청소년으로 살아가기란 생각보다 쉽지가 않습니다. 학교 내에서의 성적 문제, 친구 문제, 부모님과의 갈등 문제, 진로 문제 등등 모든 사람이 거치는 시기이면서도 이 세상에 나만 남았구나 하고 느끼는(착각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조영선님이 쓴 《인권을 만난 교육, 교육을 만난 교육》의 제목을 보고 학생인권과 교권 그 어디즈음에 대해 쓴 책이겠거니 했습니다. 내가 학생의 입장으로 궁금해했던 교사의 입장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인권 동아리를 운영하면서 학생인권에 관심이 많아진 만큼 학생들을 대하는 선생님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그 전과는 다른 마음가짐을 가지니 눈에 보이고 바라보는 것도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언제나 신학기가 다가오면 긴장되는 것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학생들을 만나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학생을 만나다 보니 학생을 파악하고 장악하는데 더 많은 힘을 쏟게 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내가 어떤 학생과 만났는지 기억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말을 잘 듣는 학생이었는지 아니었는지의 여부만 기억하기도 했죠. 이러한 과정에서 사람이 사람을 만날 때, 한쪽이 다른 쪽을 통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 만남에서 큰 벽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 14쪽, '책을 퍼내며' 가운데

 

이 부분을 읽고 학생으로서 알면 안 되는 부분을 알게 된 기분이었습니다. 청소년의 입장에서, 학생의 입장에서 선생님은 커다란 어른이었고 나를 지도해주는 나와는 다른 심지어 선생님인 어른이기에 너무 높은 대상으로 섬기며 인간으로서 완벽하길 바란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선생님들이 통제할 수 없는 학생들을 만나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할 거라곤 학생으로서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같은 맥락에서 인권 동아리를 운영하면서 학생인권에 대해 알고나니 교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고 평소 수업시간에 선생님들이 당혹해하시거나 속상해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같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내가 알면 안 되는 걸 알아버린 기분.

 

사회 시간, 선생님이 영화를 틀어줬는데 평소에도 다른 선생님들과 트러블이 많던 남학생이 선생님과 말싸움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남학생이 선을 넘는 말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고 순간적으로 선생님이 너무 안쓰럽기도, 그 남자애가 짜증나기도 해서 제가 끼어들어서 조용히 좀 하고 영화 좀 보자고 말을 꺼냈습니다. 제가 그렇게 말하니 주변 다른 애들도 조용히 좀 하라며 말을 보태, 조용히 넘어갔습니다. 그 남자애가 그런 이유는 뭐였을까요. 선천적으로 마음이 비뚤어지고 마음가짐이 잘못 되어서 그런 걸까요. 아니요. 저는 그 남자애가 특정 인물한테만 그러는 걸 자주 지켜봤습니다. 특히 여자애들한테는 '찐따년이 존나 시끄럽네'라며 자기가 우위에 있다고 생각할 때만 강약약강으로 굴던 찌질한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학교를 다니다보면 반에 저런 남자애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선생님들은 그런 남자애들의 장난이나 비하로 웃음거리를 만드는 걸 눈치 못 채더군요. 주변에서 바라보는 입장으로서 너무 답답하고 선생님이 안쓰러웠지만 제가 거기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요. 거기서 한마디 하는 순간 저는 소위 '쿨하지 못한, 장난을 장난으로 섬기지 못하는 분위기 파악 못하는 찐따'가 될 겁니다. 주로 남자애들이 그런 분위기를 주도하죠. 이런 모습들을 중학교 내내 지켜보고 나니 저는 담임선생님이 너무 힘들어 보였습니다. 학생이기에 적당한 말로 어르고 달래며, 선생님이 받은 상처와 모욕감들은 누가 보듬어주지도 않고, 그렇게 상처가 쌓이겠지요.

 

그런 상황에서 학생과의 관계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학생을 통제하려는 선생님들이 생기고, 학생의 입장에서 느끼기에 유대관계가 불충분하다 느끼는 학생들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책에서 보면, 학생인권과 교권을 중심으로 서로의 관계성과 학교에서 학생과 선생과의 관계를 엮은 예시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저도 옛날에는 선생님이 어른이고, 선생님이니까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케어해주고 보듬어줘야지 하는 생각을 마음 한구석에 갖고 있었지만, 몇몇 선생님들한테는 학생인권을 내세우며 반발하고 싶을 때가 있기도 합니다.

 

"인권의 눈으로 본 학생의 문제행동" 부분에서는 선생님이 학생에게 가하는 폭력과 학생이 선생님에게 가하는 폭력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물론 학생이 선생님에게 가하는 폭력들도 있겠지만, 저는 선생님이 학생에게 가하는 폭력을 더 자주 목격했고, 저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학생인권과 교권 자체가 하나로 단일화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고, 경우가 너무 많기에 하나로 통틀어 말할 수는 없지만 두발과 복장규제에 대해서 말을 해봅시다.

 

제가 다녔던 중학교는 서울 강남8학군중에서도 강남역에 바로 붙어있는 학교입니다. 1학년 2학기 때 전학을 오자, 생활지도부 선생님께서 한 말씀은 저에게 '여기 학교는 니가 다니던 학교랑 급이 다르니까 거기서처럼 행동하면 안 된다.'였습니다. 저의 어떤 모습을 보고 그런식으로 말씀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선생님이 어떤 시선으로 저를 보고 대하셨는지는 바로 느꼈습니다. 그 이후에도 교문 앞에서 생활지도부 선생님과 학생들이 주르륵 서서 등교할 때마다 지켜보며 추운 겨울날 아우터 안에 마이를 입었는지, 가디건을 입었는지 얼굴에 화장품은 안 발랐는지 확인을 당하곤 했습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얼굴이 하얘지는 편이라 선크림만 발라도 추운 겨울 바람을 맞으면 피부가 더 하얘져서 얼굴에 뭔가를 바른 것처럼 보이기는 합니다. 선생님이 그런 저를 수차례 잡으셨고, 저는 '아니다. 만져봐라. 선크림밖에 안 발랐다.' 하였지만 선생님을 물티슈를 주며 얼굴을 닦으라고 하셨고 저는 스트레스를 받아 그 다음부터는 선크림조차 바르지 않았고, 또 걸릴 시에는 그냥 물티슈로 얼굴을 닦고 말았습니다.

 

추운 겨울날, 롱패딩안에는 무조건 부직포에다가 작아서 온 몸이 불편한 마이를 입으라며 안 입은 학생들 옷을 걷어가던 선생님이 저는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특히 여학생들 마이는 유치원생이 입으면 맞을만한 작은 사이즈에 따뜻하지도 않은 부직포 같은 얇은 옷을 입고 생활하라뇨. 학교에서 얼어 뒤질 것 같은데 히터라도 빵빵하게 맨날 틀어주면 몰라요. 생지부 선생님들도 그러고 싶지 않지만 교장 선생님께서 위에서 지침이 내려왔다며 가차 없이 옷을 걷어갔습니다. 물론 이런 상황에도 항상 예외는 있죠. 학생의 눈으로 보기에도 좀 심한, 예의가 없는 학생들은 있으니까요. 이렇게 따지고 드니 모든 상황에서 선생님과 학생들 둘 다 차별을 받고, 인권을 침해당하고, 상처를 받네요. 교권과 학생인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자잘한 사항들이 아닌 커다란 틀을 바꾸어야 바뀌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1년간 고등학교를 다니며 저는 한국에서는 학교를 어떻게 다녔나 싶을 정도로 너무 편하게 느껴졌습니다. 한국 학교는 통제와 억압에 둘러싸인 우리 같이 느껴졌습니다. 인종이 애초에 다양하기에 머리색이나 두발자유를 할 수 없음은 물론 교복이 없기에 학생들은 자유로운 복장으로 제한받지 않고 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모습을 매일 봐왔습니다. 학교에서는 아주 간단한 규칙이 있었는데 그건 너무 기다란 손톱이나, 너무 짧은 옷을 금지하는 것이었지만, 학교에서 그 규칙을 따지고 들며 학생들을 통제하려하는 선생님들은 없었고, 그런 통제가 없으니 학생들은 알아서 자기 스스로를 통제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수업시간에 또한, 자기가 원하는 수업을 선택해서 수업을 듣는 형식이라 C이하를 받으면 수업을 다시 들어야 하는데, 다시 듣는건 자기 손해이기에 수업시간에 크게 방해하거나 반항하는 학생도 없었습니다. 물론 문제가 없지는 않겠지만, 한국보다는 비교적 여유롭고 서로 편안한 분위기였습니다. 학교가 이렇게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제가 느끼기에는 선생님과 학생의 교집합이 크게 없다는 점이였습니다. 담임선생님이라는 개념이 없기에 학생 하나하나의 성적과 가정생활, 성적을 제재하는 사람이 없고, 이 말인즉슨 반이 없기에 학생들끼리 하루종일 몰려있지 않아서 학교폭력도 덜 발생하며혹시 발생한다 하더라도 한국보다 훨씬 강한 조치를 취하기에 쉬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선생님들은 자기 과목 시간에 자기 반에 들어오는 학생이 말을 안들으면 맘대로 그 학생을 드랍할 수 있기에, 학생들은 수업시간을 잘 따라가려 노력하는 분위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 학교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변할 수는 없겠지요. 일단 교육부에서 권장하는 공부량만 줄여도 많이 달라질 거라 생각합니다. 이 책의 마지막 챕터 제목이 '학생이 아니라 교육을 바꾸기 위해' 인 것처럼 우리는 학생 개개인이나, 선생님 개개인을 탓하며 욕할게 아니라 우리의 관계를 이렇게 만들어버린 학교의 체제에 대해 반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상황에 놓인 것일 뿐 우리가 그 상황은 만든 게 아니니까요.

 

그럼 다시 돌아가 제목에 대해 이야기 해보죠. 교권이 먼저일까요 학생인권이 먼저일까요. 학생이 선생님보다 학교에 늦게 들어오니까, 교권이 먼저 적립되어야 하나요? 저는 학생인권이 보장된다면 교권은 당연히 뒤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준화 할 수는 없지만, 학생들이 반발하거나 반항하는 이유는 교칙이나, 공부 때문이기도 하지만 간혹 선생님 개개인의 문제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핀트가 안 맞는다고 하죠. 사람 대 사람으로서 서로 잘 맞는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이 먼저 개인적인 견해를 드러내거나 그 이상의 행동이나 말을 하였기에 학생들이 그러하지 않았나 감히 예상해 봅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에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제 경험상 선생님에게 제 마음을 드러낸다면 선생님도 마음을 드러내는 경우가 대다수였습니다. 학생 때문에 힘들어하시는 선생님은 그 학생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 그냥 마음만 열어보는 건 어떨까요. 물론 쉽지 않은 건 알지만, 최선을 다했다면 저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도 사람이기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글: 서지민

 

 

 

[3] 교사를 위한 학생인권은 가능하다



나는 성과 평등에서 대해서 이야기하는 교육자이다. 나는 이 책을 인권교육이라는 교육과정에 대한 이야긴 줄 알고 읽기 시작했으나, 읽어보니 그보다 더 큰 책이었다. 학생들의 행동과 교사들의 현실, 생각들을 인권의 관점으로 풀어낸 책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외부강사로서 학급을 담당할 일이 없고, 1년씩 청소년들을 만나지 않는다. 생활지도도 하지 않는다. 짧게는 40분을 만나는 교육자인 나에게도 이 책은 많은 고민을 안겨주었다. 이 책은 비단 학교 교사라는 교육자에게만 적용되는 내용은 아니다. 

나는 성과 평등을 말하는 사람이고 단 하루, 한 시간만이어도 청소년들이 자유롭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수업 시간에 자면 깨우지 않고, 그이들을 깨우는 교사가 불편했다. 소위 수업을 방해하는 행동을 하면 난 적절히 무마시키고 넘어갔다. 이런 생각이 얼마나 짧은 생각인지 나에게 알려 준 책, 강사로서의 교실 안을 어떻게 볼 것인지 친절하게 알려준 책이 바로 교사 조영선이 쓴 《인권을 만난 교육, 교육을 만난 교육》이다.

수업 방해 행위의 기준이 매시간 일관되게 존재한다는 것은 오히려 학교 수업이 천편일률적이라는 것, 배우는 과정 사이에 ‘쉼’과 ‘회복’이 포함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문제 행동은 어떤 일탈 행위라기 보다는 이 순간에 일어나는 배움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 46쪽 

 


이 부분을 읽으며 내가 그동안 문제 행동으로서 읽고 경계하고자 했던 내용들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엎드려 자는 것, 돌아다니는 것, 떠드는 것 등 전형적인 내용이었고 나는 이를 학교 교사들이 지도하듯 하지 않았고 가만히 두었음에만 만족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질문은 달라졌어야 했다. 비교는 다른 교사와 강사와 할 것이 아닌 나 스스로에게 질문했어야 했다. 왜 학생들은 저런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는가, 나의 수업은, 나는 어땠는가, 하는 질문을 가져야 했다. 질문을 받지 않는 사람은 비교적 강자의 위치에 놓인 사람이다. 늘 질문을 받는 건, 학생, 청소년, 노동자, 성소수자들이었음을 다시금 새기게 되었다. 

실제 교육과정을 결정하는 것은 교사가 아닌 국가입니다. 교사는 이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복종의 의무’를 집니다. 대학 교수는 수업 교재를 직접 결정할 수 있지만, 교사들은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 검인정 교과서만 사용해야 합니다.

- 274쪽 


이 말을 듣고 격하게 공감했다. 나의 경우 성과 인권을 이야기하기에, 경우에 따라 내용을 학교 측과 조정해야 할 때가 있었다. 내용 수정을 요청받을 때, 명분은 '학부모가 예민하다. 요즘 사회적 분위기가 그렇지 않다. 교장 선생님이 안 된다고 하셨다'라는 행정적인 게 주로 문제가 되었다. 그 과정에는 교육의 수요자인 학생의 요구는 없었다. 심지어 학생들은 성소수자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고 그래서 나를 불러 강의를 하고자 했지만 교육 당일 해당 교과에 교사는 나에게 교장 선생님의 반대가 있었다며 성소수자 이야기를 하지 말아 줄 것을 요청했다. 

이런 경우 나의 수업권, 교육 내용에 대한 설계 등의 권한은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프리랜서 강사는 교육에 대한 권한이 없는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국가의 행정, 그리고 국가가 방기하는 사회적 책임으로 인해 나의 수업을 편성하고 진행할 권리가 침해받게 되었다. 그것도 그 구조의 피해자인 교사로부터, 교장으로부터 그래서 결국 학생의 교육권, 인권은 침해받았다. 이를 어떻게 봐야할까, 라는 생각이 든다. 

프리랜서 강사 역시 교사, 교육자이다. 교사로서의 교육공무원의 권리뿐만 아니라 프리랜서 강사들이 교사와 만나고, 그 교육 현장에서 학생, 청소년을 마주할 때 우리의 가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한 프리랜서 강사에 대한 교사론이 필요하다. 

역시 인권의 이야기는 찜찜하다. 늘 그렇듯 질문만 한 아름 가져가는 시간이었다. 당연한 것을 다시 확인해야 하는 시기일까? "가장 인권적인 것이 가장 교육적인 것이다"라는 슬로건을 다시 생각하며 교사로서의 권리도, 그 현장의 학생인권도 모두 보장받아 우리가 평등으로 가까워지길 기대하게 만드는 책이다.

 

 

- 글: 강동희(동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