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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들

[23호][관점들] 『체벌거부선언』리뷰 - 폭력에 대한 거부 선언

이번 [관점들]은 최근 발간된 『체벌거부선언-폭력을 행하지도 당하지도 않겠다는 53인의 이야기』 (교육공동체 벗, 2019)의 리뷰입니다. 2018년에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가 기획한 체벌 거부 선언 캠페인이 계기가 되어 부모 16인, 교사 15인과 어린이·청소년, 청소년인권운동 활동가, 병역거부자 등을 비롯해 총 53인이 함께 쓴 책인데요, "이제 체벌은 사라지지 않았나?"에 대한 각자의 답을 모은 글이기도 합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구매해서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폭력에 대한 거부 선언

 

- 글: 토토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회원)

 

 

어떠한 형태의 폭력은 지독히도 눈에 띄지 않는다. 폭력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누군가는 폭력을 행사해도 괜찮은 자리에 있었고 누군가는 폭력을 당해도 괜찮은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체벌은 권력의 문제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이든, 교사와 학생의 관계이든, 비청소년과 청소년의 관계이든 폭력에 노출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구도의 본질에는 차이가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구도가 유지되는 한 폭력의 유무는 오로지 행사자의 선의에 의존하게 된다. 내가 비교적 온순한 성향의 부모-교사-비청소년을 만난 것이 위안이 될 수 없는 까닭이다. 체벌, 그 자체보다 더 염려스러운 것은 체벌이라 불리우는 폭력에 붙는 다양한 수식어들이다. ‘사랑의’, ‘합리적인’, ‘그럴만한’, 등의 수식은 체벌의 본질, 즉 그것이 폭력이라는 것을 가리고 부차적 요소에 집착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러한 것은 부차적인 것조차 되지 못하는 폭력을 왜곡하는 미사여구겠지만.

 

지금의 어린이, 청소년이 겪는 폭력상항은 믈론이고 이미 비청소년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과거에 겪었던 폭력 상황에 대한 논의 역시 절실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체벌 거부를 선언한 53인에는 물론 어린이, 청소년도 있었지만 청소년 운동을 하는 비청소년, 부모, 교사 등 다양한 입장의 사람들의 선언문이 존재했다. 그들도 언젠가는 청소년이었다. 많은 이들이 망각하는 것이지만 인간의 삶은 단절적인 것이 아니기에 언젠가의 나와 지금의 나는 분리된 것이 아니다. 선언문들을 읽으며 과거의 폭력 상황이 여전히 어떤 방식으로든 현재의 그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강하게 느꼈다. 어쩌다 비청소년이 되어버린 나는 오늘의 체벌을 거부하며 내가 겪었어야 했던 폭력을 바라볼 힘을 얻는다. 나는 오랜 시간 가정 내에서 겪었던 폭력을 언급하는 행위에 대해 ‘남 부끄럽고’, ‘부모 얼굴의 먹칠하는’ 행위로 여겼었다. 솔직히 그것을 폭력으로 인지하지도 못했다. 당연히 그 사람은 나를 때릴 수 있는 사람이고 나는 맞을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폭력 상황에 대한 인정은 ‘그때의 나’를 부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지금의 나’를 견디게 해주었다 생각한다. 더 나아가 이미 폭력으로 길들여진 내가 어린이, 청소년과 어떻게 폭력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관계 맺으며 살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혐오와 폭력에 물든 사회를 불편해하며 ‘왜’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어째서 사람들은 이토록 함부로 폭력을 저지를 수 있을까. 폭력의 상황을 관찰해보면 타인의 피상적인 정체성을 바탕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관계를 형성하는 참 편리한 방법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해야 할 것과 취해야 할 입장이 명확해진다. 굳이 한 사람, 한 사람을 공들여 살피고 고려하고 조심스럽게 ‘너’와 ‘나’의 관계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다. 나이, 성별, 신체, 지위 등을 기반으로 주류의 시각에서 비주류의 ‘마땅히 그래야 할’ 정체성을 설정한 후 그 정체성에 포함되지 않는 비주류의 정체성은 마치 없는 것처럼 취급한다.

 

체벌과 폭력이 사라진 사회가 문제없는 사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계 맺음에 있어 효율적이지 못하고 ‘지나치게’ 애를 써야 할 것이다. 가장 절망스러운 상황은 문제가 되어야 할 것이 문제조차 되지 못하는 경우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갈등이 가시화될 수 있는 폭력 없는 사회는 시끄러울지언정 절망스럽지는 않을지 모른다. 당연하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알아가는 상황에서 마찰이 일어나는 것은. 지금까지는 그 마찰음을 폭력으로 조용히 해왔다는 데에 있다. 그렇기에 2019년 지금의 체벌 거부 선언은 폭력적인 관계 맺음에 대한 거부 선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