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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활동가의 사는 이야기

[34호] [사는 이야기] 사고 후 첫마디

'청소년활동가의 사는 이야기' 코너는 청소년활동가로서 스스로를 정체화하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의 고민이나 활동가로서의 삶과 활동에 대한 이야기(에피소드 등)를 담는 코너입니다. 활동가로 살며 겪는 고민들, 청소년활동가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 등이 있다면 [사는 이야기] 코너의 문을 두드려 주시는 것도 방법입니다! 자세한 방법은 활기에 문의해주시면 안내드리겠습니다. 

 

* 이번 호는 인권교육센터 들의 상임활동가인 개굴이 안식년을 보내며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부끄럽게도 활력소 공개 일정이 많이 늦어지게 되어... 이미 개굴의 안식년은 마무리 되고 활동에 복귀했답니다. 앞으로는 아직 따끈따끈할 때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활력소 편집팀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개굴(배경내)입니다. 저는 올해 안식년을 맞아 전국 유랑도 다니고, 새로운 배움에도 도전하고 있어요(청소년인권단체들이 유급 안식년 제도를 도입하기엔 기반이 부족한 점을 떠올리면 제 안식년이 호사처럼 여겨져 절로 미안해집니다ㅠ.ㅠ). 그중 하나가 운전입니다. 8월 초 첫 번째이자 다행히 아직까진 마지막인 차 사고를 냈어요. 저도 어떤 부분에서는 신출내기이자 사고뭉치랍니다^^;; 사고 후 더 겸손해진 마음으로 운전 관련 동영상도 열심히 찾아보고 취약점인 오른쪽 사이드미러 보는 법도 익히게 되었어요. 
인권활동에서도 크고 작은 사고들이 일어나지요. 그럴 때 떠올려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저의 부끄러운 사고 기록을 남겨봅니다.

기습 폭우가 사나흘 이어지던 날이었다. 잠시 갰던 하늘이 성난 비를 다시 뿜어대려는지 잔뜩 찌푸려있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휴대전화를 집어 드니 낯익은 번호가 떴다. 장롱면허 탈출을 위해 운전 연습을 할 요량으로 즐겨 이용하던 차량 공유 업체였다. “예약하신 차량이 정비에 들어가야 하는 관계로 다른 차량으로 바꿔드리려고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괜찮을 리가? 초보 운전자에겐 아주 미세한 변화도 불길한 신호로 느껴지는 법이다. 

 

올 5월 제주 삼달다방에서 한달살이 하면서 30년만에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 왕 진짜 생초보 운전자에게 운전대를 넘긴 박옥순의 무모함 덕분에 장롱면허 탈출에 본격 도전하게 되었다.

 

이놈의 회사는 미리 미리 정비를 해둘 것이지, 꼭 하루 전날 전화람! 대여 가격과 차종을 비교해가며 애써 예약한 수고를 뒤엎는 연락만 벌써 세 번째였다. 전화한 노동자가 뭔 잘못이겠나 싶어 짜증을 누르며 어떤 차로 바꿀 수 있는지 물었다. “예약하신 장소에서는 올 뉴 아반떼 차량만 가능하세요.” 올 뉴 아반떼? 낯선 이름이었다. 크기를 물어보니 준중형이란다. 그간 소형차만 몰아본 터라 심장이 살짝 쪼그라들었지만, 운전 연수 때 몰았던 차가 마침 아반떼여서 아주 큰 차이는 없겠지 싶었다. 운전에 조금씩 자신도 붙던 때라 이참에 조금 큰 차를 몰아봐도 괜찮겠다 싶기도 했다. “네, 그 차로 할게요.” 투둑투둑 투두두둑 쏴아아아. 전화를 끊자마자 비가 매섭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괜히 한다고 했나? 불길한 마음을 달래며 얼른 창문을 닫았다. 

공룡을 타고 나선 도로

이튿날 아침, 다행히 날이 갰다. 밤새 떨어진 물 폭탄 피해 소식으로 아침 뉴스가 빼곡했다. 교통방송은 한강 수위가 도로 턱밑까지 치솟아 올림픽대로가 전면 통제되고 강변북로 일부 구간도 막혔다는 소식을 숨 가쁘게 전했다. 운전을 미룰까? 당일에 예약을 취소하면 제법 센 수수료를 물어야 했다. 내일 또 비가 쏟아진다는데, 비가 갠 날에 기가 막히게 예약한 것도 행운이려니 싶어 강행키로 했다. 헉! 차를 빌리기로 한 장소에 도착해 보니 웬 공룡 같은 녀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준중형이라더니 뭐 이리 커? 소형에만 익숙한 나에게는 폭도, 길이도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다. 모든 게 달라져서 All New 아반떼인 모양이었다. 내 몸집에 비해 과하게 너른 운전석에 앉으니 안락하기는커녕 부담스럽기만 했다. 할 수 있어! 쪼그라든 심장에 공기를 불어 넣고 길게 숨을 내뱉고선 시동을 켰다. 엎드려 있던 공룡이 몸을 일으켰다. 

평일 낮인데도 거리엔 차가 꽤 많았다. 익숙한 동네를 벗어나 낯선 길에 들어서자 점점 더 겁이 났다. 좌회전하자마자 우회전해야 하는 4차선 구간을 겨우 통과하고서는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용산구청을 지나자마자 있는 작은 터널에 진입할 무렵, 곧 우회전하라는 내비게이션 안내가 떴다. 나는 가운데 차선을 달리고 있었다. 오른쪽 차선 진입을 노렸지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차들 사이로 좀체 틈이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직진하다간 반포대교를 타고 물난리가 난 강남까지 꼼짝없이 넘어갈 판이었다. 손에 진땀이 맺혔다. 마침 오른쪽에서 다가오는 택시 뒤로 약간 틈이 보였다. 저 택시를 보내고 곧장 들어가면 되겠군. 택시가 옆을 지나쳤다 싶을 때 핸들을 꺾어 차의 고개를 들이밀었다. 치이이이이익. 공룡의 긴 주둥이가 택시의 옆구리를 긁고서는 꽁무니까지 콩 하고 박아버렸다. 꺄아아악! 핸들에 얼굴을 파묻었다. 

 

9월 강원도로 한낱, 호연과 여행을 떠났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던 저 공룡을 다시 빌려서 여행했다. 다행히 셋 모두 살아있다ㅋㅋ

 

신경질 부리는 차들 사이에서 

멈춰선 택시 운전석에서 늙수그레한 남자 기사가 내리더니 휴대전화를 꺼내 사고 부위부터 찍기 시작했다.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 와중에 나이든 남자가 입은 하얀 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빵빵!! 차선이 두 개나 막히자 뒤에서 오던 차들이 경적을 울려댔다. 어제부터 뭔가 불길하더라니, 이제 어떡하지? 차 안에 꼭꼭 숨어 있고픈 마음을 이기고 문을 열고 내렸다. 악몽 같은 현실을 대면해야 했다. 
“안 다치셨어요?” 
기사는 질문엔 대답하지 않고 답답해서 죽겠다는 투로 말했다.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요? 이거 뽑은 지 얼마 안 된 차란 말야. 캐릭터 페인팅도 엊그제 새로 한 건데 거참!” 
카카오택시 외관에 그려진 귀여운 라이언 얼굴 위로 긁힌 자국이 길고 선명했다. 트렁크 왼쪽 아래도 찌그러져 있었다.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기사님.” 택시만큼은 아니지만 내 차의 범퍼 아래쪽도 부상을 입었다. 빵빵!! 차들이 멈춰 선 우리를 향해 계속 신경질을 부리며 지나갔다. 죄다 내 욕을 하며 지나가는 것만 같아 얼굴이 따끔거렸다. 덜덜덜 운전대를 다시 잡고 차부터 얼른 도로변으로 옮겼다. 

“제가 무리하게 끼어들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진심이 전해졌는지 기사의 표정도 한결 누그러졌다. 그때 택시 뒷좌석 문이 열리더니 젊은 남자가 내렸다. 헉! 손님까지 타고 있었구나! 상황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콩알만 해진 간이 모래알보다 더 작아졌다. 남자가 입은 티셔츠 가슴팍에 달린 무지개 모양 태그가 행운의 부적처럼 느껴졌다. 혹시 성소수자 인권과 관련 있는 분은 아닐까. 다친 데는 없냐니 그가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보조석 뒤에 타고 있었는걸요. 심하게 부딪힌 것도 아니니 괜찮아요.” 다치지 않아서도 고마운데 이런 관대함까지 베풀다니! 남자는 렌트 차량인 걸 어찌 알았는지 보험 가입했으면 업체에서 알아서 처리해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까지 시켜주었다. 빌린 차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운전 실력을 보니 자차를 끌고 나왔을 리 없다는 말일까? 복잡한 생각이 스쳤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번호판 테두리에 업체명이 쓰여 있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인심 좋은 손님이 다른 교통편을 찾아 떠난 뒤 사고 접수 전화를 걸었다. 자기부담금을 최대 5만 원만 내면 되는 면책보험에 가입해둔 게 천만다행이었다. 

납작 엎드린 자세 때문인지, 보험 얘기를 들어서인지 이내 기사의 말투가 하소연으로 돌아섰다. “무릎도 살짝 다친 것 같애. 나, 일부러 드러눕고 보험금 타내는 그런 사람 아니에요. 보험으로 보상받아도 영업 못 뛰어서 받는 피해는 하나도 커버 안 된다니까.” 남자의 말에 병원은 꼭 가보셔라, 걱정되시겠다, 죄송해서 어쩌나, 하나하나 공손히 답했다. “내일 마누라 데리고 병원도 가야 하는데 큰일이네. 마누라한테 살짝 치매 끼가 왔거든.” 슬쩍 말을 놓는 데다 아픈 부인 이야기까지 꺼내놓는 걸 보니 보험사가 출동할 때까지 남자의 입이 쉬지 않을 것 같았다. 정신을 수습할 겨를과 노려보며 지나는 차들로부터 숨을 곳이 필요했다. 
“다치셨는데 차에 앉아서 기다리시면 어떠세요?”
“보험사 오면 아줌마가 100% 잘못한 거라고 확실히 말해줘야 해요.” 
‘저는 기사님이라고 불렀는데 저한텐 왜 아줌마라고 부르시나요? 흑흑.’
다시 한번 다짐을 받고서야 기사는 제 차로 돌아갔다. 

휴, 살았다

차로 숨어들어와 운전석에 앉으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차를 바꾸게 만든 업체를 원망하다가 왜 이런 날에 굳이 차를 끌고 나왔나 내 탓을 하다가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라디오 클래식 채널을 틀고 눈을 감았다. 문득 혼자라는 게 조금 서러워졌다. 누구라도 부를까. 아까보다 더 막히는 도로를 보니 어느 세월에 오려나 싶어 말았다. 사고 냈다고 광고할 일도 아니고, 전화로 미주알고주알 설명하자니 그도 귀찮았다. 시간이 몹시 더디 흘렀다. 출동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1시간 가까이 지나서야 도착한 보험사 직원은 몇 가지 확인하더니 5분도 안 돼 사라졌다. 이제 우리도 떠날 차례. 병원에 꼭 가보시라는 말로 기사를 배웅했다. 주의인지 덕담인지 모를 말을 건네며 그도 떠났다. 
“조심해서 운전하고 다녀요.” 
‘아저씨, 그래야 한다는 건 누구보다도 제가 더 잘 알지 않을까요? 흑흑.’

 

내 몸집과 어울리는 아담한 차가 나는 좋다. 주차 실력도 조금씩 늘고 있다.

 

사고 후 첫 마디 

주차장을 나서는데 마침 짝꿍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사고 냈어.”
“뭐? 다쳤어?”
“사람은 안 다치고 차만 다쳤어.” 
“다행이네. 액땜도 할 겸 술이나 먹자.” 
술 얘기를 듣는 순간, 술이 더욱 간절해졌다. 첫 사고를 기념하며 둘이서 술을 진탕 때려 부었다. 다 그러면서 배우는 거라고 짝꿍은 위로해주었다. 한마디 훈계라도 했다면 인권이고 뭐고 당장이라도 등짝을 후려칠 수 있는 심정이었는데, 그에게 그 정도 센스는 있어서 다행이었다.

짝꿍에게 우쭐대며 말했다. 내가 오늘 제일 잘한 게 뭔지 아냐고. 혼자서 사고에 대처한 일도 아니고, 사고를 내고도 트라우마에 갇히지 않고 다시 운전대를 잡고서는 짜잔! 반납에 성공한 일도 아니고, 바로 사고 후 꺼낸 첫마디였다고. 내 손해를 줄이려 진실을 기만하지 않고 정직하고 고운 마음으로 차에서 내려 상대의 안부를 물은 사람이 바로 나라고. 사고를 안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냈을 때 어떤 마음으로 대처하는지도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계산을 안 한 게 아니라 할 정신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물어야 할 돈이 5만 원 정도라 영혼을 팔아넘길 여지도 줄었을지 모른다는 말은 아껴두었다. 자존감이 바닥을 친 날에는 그 정도 으스댐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시간의 마디마디까지 느껴진 길고 긴 하루가 그렇게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