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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들

학교 판타지 - 《별별 교사들》을 읽고

36호 [관점들]에는 《별별 교사들 - 다양성으로 학교를 숨 쉬게 하는 교사들의 이야기》 독후감을 싣습니다.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 연혜원 님이 써주셨습니다.

 

 

고백하자면 나는 투명가방끈 활동가로서는 조금 난감하게 학교를 좋아하는 취향을 가진 사람이다. 다만 내가 학교를 좋아하는 방식은 학교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라기보다 책이나 영화 속에 존재하는 이야기 속의 '학교'를 좋아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기이한 취향의 근원을 나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까 2000, 초등학교 3학년 때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친구네 집 화장실에서 우연히 읽게 된 《해리 포터》 시리즈가 '그 취향'의 시작이었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던 《해리 포터》 시리즈는 나에게도 눈이 번쩍 뜨이게 재밌는 책이었다. 나는 완전히 《해리 포터》에 푹 빠져서는 매일 밤 《해리 포터》에 대해 생각하고, 반마다 나눠 주는 어린이 신문에서 《해리 포터》와 관련된 기사를 잘라서 클리어 파일에 모았다. 나에게 호그와트 입학 승인 편지를 가져다줄 부엉이를 어떻게 한국식 아파트 베란다로 들어올 수 있게 할 것인지 꽤나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계단 밑 벽장에 얹혀살며 11살이 될 때까지 이모 부부와 사촌의 가정폭력을 견디며 살던 작은 해리가 호그와트에 입학하는 순간 어른들의 보호를 받으며 누구보다 특별한 마법사가 되는 이야기, 그 속의 호그와트를 매일 밤 꿈꾸며 현실 속 초등학교의 많은 것들을 견뎌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선생님 주도로 1년 내내 왕따를 당했다. 반 전체가 보는 앞에서 엉뚱한 이유로 뺨을 맞기도 하고, 수업 중간에 갑자기 모두의 앞에서 우리 엄마 욕을 들어야 하기도 했다. 중학생이 되어서 알게 된 전 말은 그 모든 폭력이 단순히 엄마가 그깟 촌지를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행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을 알고도 나와 엄마가 다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서 울음을 뱉는 어른이 되었을 뿐이다. 폭력의 잔흔은 이렇게 깊은데 그 일에 대해 나와 우리 가족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보다 먼저 초등학교 1학년 때는 같은 반 친구가 교사 주도 왕따로 학교를 그만뒀다. 그 친구는 나와 유치원 때 가장 친한 친구였다. 유치원 때 나는 심각한 ADHD를 가진 아이였는데 그래서 유치원 때부터도 특정한 수업들은 전혀 따라가지 못했고, 친구들에게는 매일 놀림을 당하기 일 수였다. 그런 나의 유일한 친구가 그 친구였다. 나중에 부모님이 말해줘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친구는 소위 '자폐아'로 불리곤 했던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나는 다른 친구들은 다 밉고 그 친구가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이 제일 좋아서 당연히 그 친구를 장애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만약 그때 그 친구가 장애인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아마 나도 장애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유치원 때 함께 놀던 그 친구와 공교롭게도 초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 됐는데 초등학생이 되자마자 그 친구는 초등학교 교실에서 더 장애인이 되었다. 이 역시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친구의 부모도 촌지를 요구받았고(그 놈의 촌지!) 그의 집은 교사에게 촌지를 줄 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다. 고로 그 부모가 교사에게 촌지를 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 친구는 정당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매일 모두의 앞에서 '특이행동'을 이유로 교사에게 혼나고, 교사 주도로 왕따를 당해야 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친구는 조용히 학교를 그만뒀다.

 

이 밖에도 무수한 폭력을 초등학교 때 처음 배웠다. 당연히 나에게 처음 폭력을 가르친 것은 교사들이었다. 아이를 때리는 어른들을 모두 초등학교에서 만났다. 내게 현실의 학교는 조금만 취약하거나 가족에게 돈이 없으면 교사 주도로 무자비하게 공격받는 곳이었다. 해리 포터 같은 모험도, 모험 끝에 돌아오면 격려해주는 선생님도 학교에는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초등학생 때 하룻밤만 더 자면 부엉이가 날아와서 나를 호그와트로 데려다 줄 거라고 믿으며 폭력적인 학교의 경험을 또 다른 학교에 대한 환상으로 해소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조금 더 자라서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부엉이가 나를 호그와트에 데려가 줄 거라는 희망이 사라질수록 나는 점점 더 학교에서 나를 잘 감추는 사람으로 자랐다. 특히나 고등학생 때는 학교에서 내 의견을 조금이라도 주장해 본 적이 없다. 학교는 그냥 자습하러 가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중고등학생 때 내내 우울증으로 고생했지만 조금만 더 참아서 벗어나자는 마음만으로 중고등학교 6년을 버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나는 여전히 나만의 '학교 판타지'를 품고 산다. 여전히 학교가 나오는 드라마들을 좋아하고, (대학원도 학교라면) 아직도 학교에 다니고 있으며, 급기야 학교를 연구하고, 학교와 관련된 시민운동을 하면서 살아간다.

 

 

교사들도 학교 안에서 평등하지 않다

 

이 글은 사실 책 《별별 교사들》(이윤승 외, 교육공동체 벗)에 대한 글이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한 페이지 넘게 내 얘기만 주저리주저리 해버린 까닭은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교사들이 이 책에 쓴 각자의 허심탄회한 글 속에서 내가 품고 살아온 학교에 대한 이야기들이 반복해서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현재 이 책을 쓴 저자들 중 많은 사람들과 세대가 비슷하다. 그들도 나와 비슷한 시기에 학교에서 고통받았고, 교사가 되어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그들은 나와 같이 학교에서 약자였거나, 학교를 증오했거나, 혹은 학교를 여전히 증오하고 있음에도 다시 학교로 돌아와 학교에 남아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자꾸만 그들에게서 나를 발견해서 책장을 넘길 때마다 깊은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들이 교사로 다시 돌아온 학교라는 곳은 교사가 되었다고 해서 그들을 절대 평등하게 대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정상성을 공고하게 수호하는 엘리트 사회인 교사 사회는 그 안에 조금이라도 이질적인 교사가 있다면 마치 이물질을 걸러내듯 그 교사의 소수자성을 어떤 방식으로든 교묘하게 고통스럽게 괴롭히고야 만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교사 집단 안에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학생 집단 안에서 차이를 드러내는 것 만큼이나 위태로워 보인다.

 

2023년 여름 서이초 교사의 자살 사건 이후로 그 어느 때보다 학교 안의 고통을 말하는 여론이 '교사 대 학생 혹은 학부모' 구도로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한국 학교 안에 깊이 움튼 고통의 근원이라는 것은 '교권'의 추락에 의한 것도, '학생 인권'의 향상에 의한 것도, 학부모의 악성 민원에 의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개개인 간의 차이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방식으로 앞장서서 소수자를 혐오하는 학교의 권력지향적인 성질이 학교를 망치는 고통의 근원이라는 것을 이 책의 다양한 저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들을 수 있다. 애초에 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설계된 학교에서 결국 고통받는 것은 소수자성을 숨기기 어렵거나 감추기를 선택하지 않는 교사들, 마찬가지로 그러한 학생들이다. '교권'이 아니라 '교사 인권'이 말해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교사 집단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은 교사 집단 안의 차이를 다시금 묵살하고 교사 안에서 더 취약한 존재들이 자신의 인권을 지켜내는 것을 어렵게 할 뿐이다. 따라서 교사 인권은 학생 인권이 소수자 중심으로 평등하게 지켜져야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지켜져야 하는 것이며, 이처럼 교사 인권과 학생 인권은 평등한 인권으로 연결되어 있다.

 

다양성이 구원할 것이다

 

못말리는 학교 마니아인 나는 요즘 또 다른 시리즈를 애청하며 학교 판타지를 이어가고 있다. 내가 요즘 애청하는 시리즈는 〈하트스토퍼〉라는 영국의 넷플릭스 시리즈다.(내 생각에는 영국인들도 만만치 않게 학교에 판타지가 있는 것 같다.) 〈 하트스토퍼는 다양한 퀴어 정체성을 가진 청소년 캐릭터들을 등장시키며 학교를 중심으로 친구와 연인, 가족 안에서 퀴어 청소년들이 겪을 법한 다양한 상황들을 이야기로 풀어낸다. 처음 하트스토퍼를 보고 놀랐던 점은 소수자들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위기가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트스토퍼속 퀴어 청소년 등장인물들 곁에는 언제나 그들을 지지해주는 비청소년들이 있다. 그렇지 않은 비청소년들도 등장하지만 이 드라마는 확실하게 그런 비청소년들에게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면서 끊임없이 등장인물들에게 다른 대안적인 지지대를 만들어 준다. 이야기 안에서 청소년 캐릭터들을 둘러싼 다양한 비청소년들의 지지가 가장 설득력을 지니게 되는 지점은 무엇보다도 이야기 속 학교에 존재하는 교사들이 지닌 다양한 정체성이다. 등장인물들과 함께 학교생활을 하는 다양한 정체성의 교사들은 등장인물들이 취약해질 때마다 자신들의 경험에 비추어 조언하고 등장인물들을 지지해준다. 이처럼 학생들에게 학교 안에서 눈에 보이는 다양성만큼이나 큰 지지대는 없다. 학생인권조례 등의 제도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눈에 보이는 다양성이다. 그것은 학생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들에게도 절실한 것이다.

 

이 책에는 다양한 구원자들이 등장한다. 그것은 학생일 때도 있고, 동료 교사일 때도 있고, 외부 단체의 지지자일 때도 있고, 때론 혼자, 혹은 동료들과 뚜벅뚜벅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가는 저자 자신일 때도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학교 안에서 다양성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그들 모두를 열렬히 응원하면서도, 동시에 교육 당국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쩜 이렇게 학교 안의 다양성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는지 화가 난다. 한국에서 공교육이란 무엇인가. 한국의 공교육이 소수자성에 가까운 모든 것을 거세하는 방식으로 다양성은 가지치기하고 규범적 정상성만을 길러내는 과정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인권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다면, 한국의 공교육이 전체주의 교육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왜 여전히 학교 안의 다양성은 교사와 학생 개개인들의 몫이어야 하는가. 이 책을 읽으며 화가 났다면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질문들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이다. 교사들이 인권을 믿고, 인권을 믿는 교사들이 자신이 믿는 것을 교육으로 실천할 수 있는 학교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 확실하게 필요한 것은 더 다양한 교사와 더 다양한 학생들이 자신의 소수자성을 단순히 숨기지 않는 것에 나아가 자신의 소수자성으로 인해 차별 당하지 않을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학교일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런 학교가 현실에서 가능해져야 나도 더 이상 구질구질하게 학교 판타지 같은 것을 가지지 않고도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 연혜원(투명가방끈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