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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들

[31호][관점들] 1991 열사투쟁 30주기 김철수 열사 정신계승 초청강좌 ‘1991 고등학생운동이 지금의 청소년에게’ 후기

31호 [관점들]에는 6월 2일 광주에서 1991년 투쟁 30주년, 김철수 열사 30주기를 맞아 열렸던 강좌의 후기글을 싣습니다. 행사의 후기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청소년운동과 과거 고등학생운동 사이의 관계와 고등학생운동 기록, 기억 활동의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담았습니다. 후기는 청소년인권운동연대 지음과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 활동하고 있는 빈둥 님이 써 주셨습니다.

 

 

고등학생운동과 지금 청소년의 삶을 잇기 위해서

2021년 6월 2일, 광주교육연구소의 주최로 1991년 열사투쟁 30주기를 기념해 당시 분신 항거를 한 김철수 고등학생 열사의 정신계승을 위한 초청강좌가 광주에서 열렸다. 해당 강좌는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 거의 언급되어오지 않던 1980년대에서 1990년대의 고등학생운동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강사 전누리 씨는 고등학생운동이 중등교육의 보편화와 억압적·폭력적 교육 현실과 입시경쟁, 고조되는 정치적 정세와 기존 사회운동의 영향 속에서 지속적, 집단적, 조직적 저항으로 출현했음을 말하고, 직선제 학생회 쟁취 운동, 보충·자율학습 철폐 투쟁, 전교조 사수 투쟁 등 운동의 여러 영향과 결과를 짚었다. 이어 공안 당국의 탄압 등으로 인해 조직적 흐름이 약화되고 소멸되는 과정과 청소년운동으로의 전환, 청소년 운동의 현재에 대해 이야기했다. 토론자로는 당시 광주 지역 고등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이운기 씨, 김철수 열사의 동문인 한중호 씨, 김철수 열사 장례 실무를 진행했던 배이상헌 씨, 현재 청소년운동에서 활동하고 있는 공현 씨 등이 참여했고, 광주 고등학생운동의 흐름과 김철수 열사 분신 투쟁 당시의 기억, 김철수 열사가 가지고 있던 교육에 대한 고민, 고등학생운동 재현에 대한 문제의식 등이 논의되었다. 

한편 ‘1991 고등학생운동이 지금의 청소년에게’라는 강좌의 이름이 무색하게 참여자 중 청소년은 없었다. 코로나19 시국에 홍보가 부족했거나, 청소년이 자신의 시간을 자유롭게 쓰기 어려운 점, 행사가 비수도권에서 이루어진 점 등 여러 요인이 있었겠지만, 고등학생운동에 대한 기억과 복원의 중요성이 사회적으로 폭넓게 공유되지 않은 흐름 속에서 청소년의 삶과 일상에 그 의미를 고민하고 소통하지 못한 점 역시 중요하게 다뤄볼 수 있지 않을까. 기억 활동이 단순히 과거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기반해 의미 부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고등학생운동을 지금 청소년의 삶과 잇는 일은 필수적이다.

 

1991년으로부터 30년, 청소년 인권 담론이 부상하고 관련 법제들이 제·개정 되었다. 사회적으로 청소년 인권과 그 침해에 대한 문제의식이 공유되면서 청소년의 삶은 변하고 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기도 하다. 김철수 열사가 문제제기한 ‘로보트 교육’은 아직도 건재하다. 학생인권조례가 일부 지역에서 제정됐지만, 강제성이 있진 않고, 부실한 조례안 내용으로 제정이 되거나 제정 자체가 무산되는 경우들도 있었다. 전국적으로 적용되는 강력한 ‘학생인권법‘은 없으며, 청소년이 주체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들은 제한적이고 그마저도 승인받을 문제가 된다. 곧, 고등학생운동에서 제기한 문제들은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 한 세대가 바뀐 지금, 그때와 사회·정치·경제적 맥락은 다르지만, 고등학생운동을 했던 이들의 기억을 모아 복원하는 행위가 지금 청소년의 삶과 함께 이해된다면 청소년의 일상에 진짜 민주주의가 들어설 수 있도록 행동할 수 있는 용기와 전망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과정은 청소년의 위치성과 억압의 체계에 대한 사유와 함께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참교육’과 고등학생운동 열사 재현이 의미하는 것들

고등학생운동 세대는 ‘참교육 세대’, 김철수 열사는 ‘참교육의 불꽃’, 김수경 열사는 ‘참교육의 등불’, 여기에 심광보 열사까지 포함해 ‘참교육 학생 열사’라고 불리곤 한다. 전누리 씨는 강렬하게 전개된 전교조 사수 투쟁의 경험 속에서 그러한 인식과 명명은 불가피할 수 있지만, 당시 청소년에 대한 사회 지배적 시선 속에서 순수성과 참교육을 강조한 결과 고등학생운동이 ‘참교육에 대한 응원‘ 정도로 기억되는 경향을 문제로 지적하며, 열사의 죽음은 참된 자아와 진정성의 숙제를 풀기 위한 노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운기 씨 또한 참교육 세대를 강조하다 보면 80년대 초반부터 시작해 기층 조직을 만들어가면서 이루어진 여러 흐름들이, 참교육 하나로 몰수돼버린다고 지적했다. 한편 ‘참교육 운동’이라는 호명에 의해 고등학생운동의 여러 측면이 간과되는 것들에 대해, 교사나 학부모 등이 오해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하지만 청소년의 사회운동은 미성숙하고 치기 어린 행동으로 여겨지는 것이 지배적이라는 점, 학생과 교사 간의 관계는 권력의 불균형을 갖는다는 점 등을 고민해본다면 이는 어쩔 수 없는 문제로 치부되어선 안된다. 비청소년 중심의 세계가 유포해온 청소년에 대한 차별적 이미지들을 개선하지 못할 뿐 아니라 운동적 주체로서의 청소년을 부정해온 지배적 통념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운동을 전교조가 표방한 ‘참교육’의 틀로 해석하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은 운동의 일부로 다뤄져야 하지, ‘참교육‘에 과도하게 집중해서는 청소년들이 가진 다양한 형태의 변화에 대한 욕망과 고민들을 놓치게 된다. 그렇기에 고등학생운동에 대한 ‘참교육’의 틀이 청소년의 위치와 어떻게 관계맺는지 고민되어야 하고, 그 사용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고등학생운동 열사 재현과도 공유된다. 6월 2일 강좌 이후 토론 당시에도 문제로 제기되었던 내용으로, 김철수 열사의 약력이 소개된 표지판 등에는 ‘모의고사 문과 수석’, ‘생활영어 최우수상 수상’, ‘교내 수학 경시대회, 영어경시대회 등에서 1등’의 문구가 적혀있다. 로보트 교육에 반대한 열사의 뜻과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다. 이는 당시 정부와 학교, 미디어 등에서 열사의 죽음을 ‘성적비관’과 ‘학교 부적응’ 등으로 호도했기에 열사 죽음의 투쟁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적게 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성적 강조는 열사의 죽음을 투쟁적으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만약 높은 성적이 투쟁성의 조건이 된다면, 성적이 낮은 학생의 죽음은 그의 주장이 어떠하든 저항으로 해석이 불가능해진다. 이는 ‘성적비관’과 마찬가지로 높은 높은 성적을 강조하는 문구가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통념 속에서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김철수 열사 외에도, 당시의 고등학생 열사들 중 김수경 열사 역시 성적이 우수했으며, 심광보 열사는 ‘명문고’에 입학했다고 이야기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청소년에게 입시는 마땅히 따라야 할 규범으로 인지하기 때문에 고등학생운동 열사의 재현 속에 성적이 강조될 수 있는 것이다. 열사의 정신 계승에 중요한 것이 ‘열사가 어떤 정치·사회·경제적 맥락 속에서,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서 죽음을 선택하게 됐는지’라면, 성적을 강조하는 등 청소년을 억압하는 체제의 말들을 열사의 재현에서 걷어 내고 청소년을 존중하는 언어로 바꿔낼 수 있어야 한다.

 


고등학생운동‘들’의 더 많은 복원과 기록을 위해

고등학생운동이 민주화운동의 역사 속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거나 ‘전교조 응원‘ 정도로 왜곡되어 해석되는 경향이 이어지는 한편, 그 안에서도 비수도권 지역의 운동들은 더욱 제대로 복원되지 못했다. 더욱이 고등학생운동 주체들이 소장하고 있던 기록은 친권자에 의해서 혹은 이동하며 없어지기도 했으며, 경찰의 내사가 들어오는 등의 이야기가 들려왔기에 무조건 태우고 없애는 게 원칙이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해당 강좌처럼 관련 이들이 모여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리는 매우 귀할 수밖에 없다.

 

 

이하는 토론 당시 광주 고등학생운동을 참여했던 이운기 씨의 기억을 중심으로, 김대현 씨(당시 김일수)의 이야기를 덧붙여 모아 기록한 내용이다. 이 역시 운동의 일부이지만 광주 고등학생운동의 기억의 조각을 잇는다는 생각으로, 더 많은 기록으로 연결될 수 있길 바라며 공유한다.

“1989년~1990년 전교조 출범과 해직 사태의 과정에서 많은 고등학생들이 징계, 퇴학, 구속 등을 당하고 학교의 일상적 감시와 탄압으로 인해 운동은 위축되었다. 당시 광주 고등학생운동은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공개된 학습조직을 통해 조직 재정비를 진행했으며, 이 조직들은 각 계열별로 많이 있었고 학생회, 동아리, 학외단체를 통해서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일정 흐름을 가지고 있었다. 재정비 과정에서 1990년 김수경 열사와 심광보 열사의 죽음을 접한 이후 침체된 고등학생운동을 수습해야 한다는 요구가 더 높아졌는데, 1991년 5월 18일에 열린 연합집회 ‘광주지역 고등학생 5.18 추모집회'가 그 돌파구였다. 당시 집회를 마치고 시내로 진출하기 위해 조선대 정문으로 행진할 때 김철수 열사의 분신 소식을 듣고 바로 그날 집회에 참여한 고등학생을 중심으로 분신대책위가 꾸려져 투쟁을 이어갔다. 김철수 열사 장례를 치르기 위해 조직된 참교육 선봉대에는 많은 중고등학생들이 참여했고, 대부분 기존에 활동을 해온 학생이 아니라 일반 학생들이었다. 학생들은 당시 장례를 주관하던 시민사회 어르신들에게 우리가 장례를 치르겠다고 제안했고, 중고등학생만으로 2천여 명이 모여 김철수 열사 장례를 치렀다. 이후 광주 고등학생운동은 그간 활동 조직을 추스려 32개 학교가 참여하는 '자주적 학생회 건설을 위한 광주지역 고등학생회’(자건회)라는 연합 조직을 만들었다. 자건회는 광주 지역의 다른 조직들과 결합하여 '학원 민주화를 위한 광주지역 고등학생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라는 연합 조직을 만들었지만, 자주적 학생회와 학원 민주화의 노선 갈등으로 오래 가지 못했다. 91년도 후반 공대위 해체와 학내 소모임, 학외단체 쇠락에도 광주 고등학생운동은 고등학생운동 출신들의 대거 재투신으로 ‘청소년열린광장’ 등 후계 모임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으며, 광주 동아리 활동과 학생회 선거에 개입해 학생회를 바꾸기 위한 노력, 고등학생 기층조직을 만들기 위한 노력들을 90년대 후반까지 이어나갔다. 하지만 이후 재투신한 고등학생운동 활동가들이 분리되고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면서 소멸됐다.”

이어지는 토론에서는 고등학생운동의 폭넓은 복원 중요성이 함께 고민되었다. ‘광주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광고협) 결성과 활동으로 구속됐던 김대현 씨는 광주 고등학생운동과 관련해 유독 광고협이 부각이 된다며 다른 많은 고등학생운동들이 존재했음을 이야기했고, 덧붙여 전위조직과 대중운동 조직을 했던 이들의 이야기에 차이가 있다고 전했다. 많은 고등학생운동들의 존재가 사회적으로 기억되고 기록되지 않아온 것은 청소년을 진정한 사회 성원으로, 운동적 주체로 바라보지 않는 지배적 인식이 강하게 작동했기 때문이 아닐까. 기록된 운동마저 전교조 등 교사운동의 외부적 존재로 다루어지곤 하니 말이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고등학생운동들의 기억들을 이어붙여 나가는 일은 청소년에 대한 차별적 인식에 대한 개선과 함께 이루어져야 할 과제가 된다.

 

그렇게 고등학생운동의 역사가 과거 완료된 사건이 아니라 지금 청소년의 일상에 민주주의를 함께 말할 수 있을 때 고등학생운동들의 기록은 폭넓은 고민과 함께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 글: 빈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