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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31호][사람들] "청소년인권에 관한 시각을 가질 수 있어 행운이었다 생각해요" - 복선 님 인터뷰

[사람들] 코너에서는 '과거의 청소년인권운동가들을 만나다'라는 주제로, 과거 활동했던 청소년활동가들을 만나고 있어요! 이번 호에서는 2005년부터 '청소년인권모임 나르샤'(구 전북청소년인권모임)에서 활동했던 복선=세치=엠덴 님의 이야기입니다. 〈오답 승리의 희망〉 발행 등의 활동을 했던 복선 님을 만나볼까요?

- 인터뷰 진행 및 정리 : 공현, 피아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저는 지금은 복선이라는 닉네임을 온라인에서 쓰고 있는데, 활동을 하고 있거나 그런 건 아니고요. 옛날에는 엠덴’, ‘세치란 이름으로 활동을 했어요. 활동가를 했다기엔 좀 거창한 것 같고, 살짝 발만 걸쳤던 정도예요. 한동안 취재 기자 일을 하다가 지금은 신문 편집자를 하고 있어요

 

 

별명이 자주 바뀌셨네요? 뭔가 의미가 있나요?

 

음, 예전 별명은 제 실명과 관련이 있어서 생략하고, ‘복선‘이란 이름은 뭐냐면요, 트위터에서 우주왕복선 이미지를 가지고 말장난을 치다가, “우주의 왕이 누구냐, 우주왕 복선이다!“ 해서 그러다가 ‘복선‘이라고 닉네임을 쓰게 됐습니다.

 

 

과거에 하셨던 청소년인권활동은 무엇이었나요?

 

고등학생 때 학교 내에서 두발자유화를 요구하는 활동을 했다든가, 오답 승리의 희망이라는 잡지를 만든다든가 하는 활동을 했어요. 2005년부터 고등학교에서는 공현과 같이 활동했는데, 같이 활동한 시기도 있었고, 공현이 졸업한 이후에는 학내에서 인권동아리를 꾸려서 활동하기도 했고요. ‘전북청소년인권모임‘나중에는 ‘청소년인권모임 나르샤‘로 이름을 바꾼 단체에서 활동했어요.

나르샤에서는 주말에 시내에 나가서 학생인권법 통과 요구 서명을 받는다거나 전단지를 뿌린다거나 하는 활동을 좀 했고요. 오답 승리의 희망을 제작하고 배포하는 것도 거기서 다같이 했고

 

 

오답 승리의 희망〉, 많이 들어봤는데 모르는 활동가들도 많을 거 같아요.

 

〈오답 승리의 희망〉 창간은 2006년부터 했고, 2013년인가에 마지막 호를 찍었어요. 그때까지 계속 어떻게 어떻게 진행이 됐던 것 같은데, 사람이 적은 와중에 몇 명이 거의 다 부담해서 했던 것 같아요. 저는 고등학생 때 정도만 좀 했고요.

오답 승리의 희망은 처음 만들 땐 청소년 자유 언론이라는 이름을 달고 했는데요. 어떤 소식을 전한다기보다는 여러 의견을 모아서 전한다는 취지로 했어요. 처음 이걸 만들게 된 것도 학교 안에 자유게시판 같은 걸 만들어보자고 했던 건데, 그럴 거면 아예 신문을 만들자고 해서 점점 커지게 됐네요. 나중에 가서는 현안에 대해 커버스토리 기획도 하고 인터뷰도 싣고 그렇게 하게 됐죠. 처음엔 신문 형태로 나왔는데 2008년에 나온 제9호부터는 책자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발행 주기가 좀 들쭉날쭉 하다 보니 시의성 있는 걸 많이 다루지 못하긴 했는데, 나름대로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기억에 남는 활동은?

 

음... 제가 지속적으로 했던 건 〈오답 승리의 희망이 거의 유일한 활동이 아니었나 싶은데... 제가 신문 편집 일을 하고 있지만, 어떻게 보면 그것도 오답 승리의 희망에서 출발했단 생각을 해요. 그렇게 생각하면 굉장히 저한테 영향을 많이 미친 건데요. 오답 승리의 희망이 그 당시에는 주목을 꽤 받았다고 생각하고, 희망제작소에서 상도 받았어요. 구성원들이 상당히 노력을 많이 했기 때문에. 여기 있는 공현이나 혜원이 일을 많이 했어요. 처음에는 1회성 기획에 그칠 뻔했는데 어쩌다보니 15번을 찍게 돼서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오답 승리의 희망이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압수물이 된 적도 있는데... (웃음) 2011년에 박정근 씨라고, 트위터에서 북한 계정을 팔로우하고 리트윗했다는 등의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압수수색을 당했는데 그때 박정근 씨가 갖고 있던 책자 압수물 목록에 있더라고요.

(박정근 씨 사건에 관한 기사 참고 >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4651.html )

 

 

 

청소년운동 이후에 어떤 삶의 경로를 밟아 오셨나요? 청소년운동의 경험이 삶에 어떤 영향을 줬나요?

 

어쩌다보니 대학에 진학했고, 어쩌다보니 학교 안에서 ’생활도서관’이라는 활동을 하게 됐어요. 생활도서관이 자치기구인데, 책을 갖춰놓고 일반적 도서관의 기능도 하면서 그 안에서 책을 갖고 세미나를 한다든지 학회 활동 지원한다든지 이런 활동들을 했거든요. 그러다 기자로 취직하게 돼서 지금까지 흘러오게 된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어떤 엄청난 의지를 갖고 한 건 아니고 어쩌다보니 이렇게 된 거 같아요.

 

청소년운동의 경험이 준 영향은... 일단 직업선택에 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고요. 언론 관련 일을 하면서 청소년인권운동의 경험이 가시적 영향을 미친다기보다는,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만드는 게 있어요. 예를 들어서 신문을 만들 때 제목을 짓잖아요. 신문에 무서운 10대들이런 제목들이 많이 나오는데 이런 걸 좀 한 번 더 걸러서 생각해볼 수 있는 그런 정도의 영향은 있다 생각해요. 그리고 지금은 신문 편집 일을 하고 있지만 이전에 취재기자 일을 할 때는 교육청에 출입했을 때가 있었기 때문에 그때 취재하면서, 예를 들어 학생인권침해 사건이 일어났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사건을 취재하고 보도해야 할 것인가 이런 거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저 스스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또, 특별한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제가 대학 졸업하고 취직한 이후에, 저보다 어리거나 제 후배로 들어왔거나 이런 사람들을 일터에서 한 번도 반말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 것에도 좀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해요.

 

 

그런 문제의식이 좀 신문사 안에서 퍼지기도 했나요?

 

제가 일하던 신문사 안에선 그렇게 공유가 되진 않았던 거 같고요. 그때 교육청에 출입하던 기자가 저 하나였고... 이렇게 저렇게 하자고 말할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래도 저 나름대로는 좀 노력했다고 생각해요. 그 당시 다른 신문사들이 좀 주목하지 않은 걸 보려고 했거든요. 특히 어디 대학에 누가 합격했다 이런 현수막을 걸곤 하는데, 그게 학생인권조례에도 위배되는 건데, 여전히 사립학교들에선 많이 이뤄지고 있거든요. 제가 돌아다니면서 취재해서 기사를 썼는데, 악플도 많이 받았죠. ‘무슨 이런 걸 보도하고 있냐하고. 그래도 그런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게 행운이라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혹은 활동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응원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을 것 같긴 해요. 시국도 시국인데...

그냥 마지막으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글쎄요... 힘내세요? 원래 힘내라는 말은 돈으로 하는 건데. (웃음)

 

 

 

네, 그럼 복선 님께서 기회가 닿으면 단체들에 후원을 해 주실 거라고 믿으며...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청소년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여기저기 많이 있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던 인터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