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청소년활동가의 사는 이야기

[26호][사는 이야기] 같이 분노하고 소리 내주는 사람들

'청소년활동가의 사는 이야기' 코너는 청소년활동가로서 스스로를 정체화하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의 고민이나 활동가로서의 삶과 활동에 대한 이야기(에피소드 등)를 담는 코너입니다. 활동가로 살며 겪는 고민들, 청소년활동가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 등이 있다면 [사는 이야기] 코너의 문을 두드려 주시는 것도 방법입니다! 자세한 방법은 현재 편집 멤버인 피아, 윤달, 공현에게 문의해주시면 안내드리겠습니다. 

 

* 이번 호는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에서 활동하는 오리 님의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활기 원고를 부탁받고 처음 한 생각은 내가 활동가인가?’였다. 이런저런 활동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스스로 나는 활동가야!’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고, ‘활동가라는 단어는 좀 더 본격적이고 비장하기까지 한 느낌이라 주춤하게 된다. 그래서 필자 소개에도 무의식중에 활동가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은 것 같다. 이 글도 위티의 일부 활동에 참여한 나의 경험 정도로 읽어주면 좋겠다.

 

사진: 오리님 제공

 

위티와 처음 함께한 프로젝트인 콘돔 전시회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나의 이야기를 할 용기가 필요해서였다. 나는 페미니즘이나 섹슈얼리티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나의 서사, 나의 경험을 배제하고 이야기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쉽게 우울해지거나, 감정적으로 힘들거나, 무력감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가 나의 이야기들을 외면하고 마치 남 일처럼 이야기한다는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콘돔전시회를 준비하며, 우리는 전시물을 제작하는 것보다 우리의 경험과 생각을 공유하는 데에 더 긴 시간을 보냈다. 둘러앉은 테이블 위로 오가는 이야기들은 모두 단단하고 따뜻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공감하고, 도닥이며 기다려주는 것이 느껴졌고, 쉽게 판단하지 않고 지지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이렇게 큰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 신기했고, 처음으로 정말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다른 준비위원들이 해주는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나도 이야기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용기가 생겼다. 그 과정에서 내가 한구석으로 미뤄두고 괜찮다고 묻어둔 나의 이야기와 언어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콘돔전시회는 어쩌면 나에게 탁자 위의 이야기를 너머 나의 이야기를 말하고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던 것도 같다.

 

나의 이야기를 하는 활동을 하면서 힘든 지점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이 시간들은 나에게 정말 큰 힘이 되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전시회의 결과보다도 과정이 너무 소중했다.

 

최근 디지털 성착취 사건을 보면서도 나는 분노하다가, 슬퍼하다가, 무기력해졌다. 가끔 사회는 정말 단단하고 견고해서 절대 바뀌지 않을 것만 같다. 내가 하는 고민과 이야기들은 아무런 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럴 때 콘준위와 나누는 대화는 정말 큰 힘이 된다. 같이 분노하는 것과 혼자 분노하는 것은 정말 큰 차이라는 것을 콘준위를 통해 느꼈다. 분노가 무기력이 아닌 힘이 될 수도 있다는 것도 느꼈다. 함께 화내고, 서로 지지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너무 소중한 일이다. 어쩌면 그게 연대라는 단어의 뜻이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활동의 정의가 어디까지인지, 어떤 사람이 활동가인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막연히 같이 분노하고 소리 내는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위티에서 내가 만난 활동가들이 그랬기 때문이다.

 

위티의 활동들을 통해 나는 더 성장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 과정이 소중하고 즐거웠다. 그리고 이 활동과 사람들이 너무 따뜻하고 좋다. 그래서 내가 활동가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하다면 같이 이야기하고, 소리 내고, 분노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지금처럼 서로의 힘이 되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

 

- 오리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