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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들

[1호] 『또 하나의 약속』 : 타인에 대한 공감이 부재한 그 자리에서 악은 움튼다.


[덕질(?)들]

영화『또 하나의 약속』

: 타인에 대한 공감이 부재한 그 자리에서 악은 움튼다.


혜원 (청소년활동기상청 활기)



다른 청소년활동가들과 같이 보고 싶고 같이 나누고 싶은 나의 덕질(?)들을 받는 리뷰코너입니다.

첫 꼭지는 활기의 혜원님이 영화 『또 하나의 약속』 이야기로 채워주셨습니다.

소개하고 싶고 나누고 싶은 덕질 이야기가 있으면 자유롭게 「활력소」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2013년 12월 이른바 ‘부림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변호인>이 개봉 후 흥행가도를 달리는 와중, 사회성이 짙은 가족영화 <또 하나의 약속>이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다.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 황유미 씨와, 가족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의 제목은 원래 <또 하나의 가족>이었다. 그러나 삼성의 광고 문구이기도 했던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말이, 사회고발영화가 아니라는 감독의 말과 다르게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던 터라 개봉을 두 달여 앞두고 <또 하나의 약속>으로 제목이 바뀌었다.


영화를 만든 김태윤 감독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 영화가 가족드라마라고 말했지만,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해 제작비를 시민들의 후원으로 마련했다는 점이나 상영관이 유난히 적게 배정되어 외압설마저 제기되었던 점을 생각해보면 단순히 가족영화라고만 여길 수는 없다. 상업영화로서 수익을 내야 했기에 삼성이라는 거대기업을 비판적으로 조명한 사회성 짙은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선 사회고발보다는 가족영화라는 쪽에 방점을 찍을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노조에도 가입하지 말라던 아버지가 대기업과 싸우게 된 이유


영화는 강원도의 굽이진 도로를 달리는 택시에서 시작한다. 강원도 속초의 가난한 택시기사인 상구(박철민 분, 실제인물 황상기 씨)의 딸 윤미(김규리 분, 실제인물 고 황유미 씨)는 어려운 집안형편으로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고등학교 졸업 후 곧바로 진성반도체(삼성전자 기흥 반도체공장)에 취직한다. 유독성 화학물질을 취급하면서도 노동자들 간의 경쟁을 유도한 성과급제로 인해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일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던 중 윤미는 쓰러지고 백혈병 진단을 받는다.


윤미에게 노조에도 들어가지 말라고 하던 상구. 산업재해보험도, 노동자로서의 권리도 제대로 모르던 윤미. 가족들은 윤미가 쓰러진 뒤에야 산업재해보험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뒤늦게 산업재해 신청을 해보았지만 근로복지공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진성반도체의 한 직원은 모욕적인 말을 하며 돈으로 끊임없이 윤미의 가족들을 회유한다. 그래도 윤미의 병과, 같이 일하던 다른 노동자들의 병은 산업재해가 분명하기에 상구는 진성반도체와 힘겨운 싸움을 벌인다. 그 싸움은 윤미가 죽은 뒤에도 계속된다. 윤미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그 죽음이 진성의 잘못이라는 것을 밝혀내는 것이, 바로 상구가 윤미와 한 '또 하나의 약속'이다.



악은 공감이 부재한 곳에서 움튼다


영화를 보는 내내 윤미와 상구를 비롯한 가족들의 이야기에 주목하려 해도 진성반도체(삼성전자)라는 거대기업이 장악한 사회의 구조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진성반도체는 막대한 자본을 가졌고, 자본이 힘인 사회에서 노동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공공기관인 근로복지공단은 진성반도체의 손을 들어줬다.


현실에서도 삼성은 막강하다. '삼성공화국'이라는 말도 있듯 삼성의 영향력은 너무나 커서 언론도, 정부도, 심지어 시민단체들도 삼성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유능한 1%가 나머지 99%를 먹여 살린다는 삼성 총수 이건희의 말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은 사회에서 그 1%인 삼성에 반하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지적했던 대로, 사유가 실종된 자리, 타인의 아픔과 절망에 대한 공감이 부재한 바로 그 자리에서 악은 움튼다. 자사의 반도체공장에서 죽어간 노동자를 외면하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던 그 죽음을 더럽히기까지 했던 삼성은 악덕기업을 넘어서 '악'에 가깝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턱없이 적은 상영관 수에도 불구하고, 주요 언론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의 약속>은 개봉 후 한 달이 지난 시점인 3월 12일 기준으로 50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손익분기점인 70만 명에는 모자라긴 하지만 영화가 마주했던 악조건을 생각한다면 결코 적은 수의 관객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또 하나의 약속>이 초거대기업 삼성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굳은 생각을 서서히 깨뜨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무노조 경영 신화'라는 말로 노동인권 유린도 세계 초일류 급임을 보여준 삼성이 죽인 또 하나의 가족들을, 그 수많은 얼굴과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곱씹어볼 기회가 우리에겐 더 많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