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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32호][사람들] "청소년운동 경험으로 저만의 관점을 가질 수 있었어요" - 김경묵 님 인터뷰

[사람들] 코너에서는 '과거의 청소년인권운동가들을 만나다'라는 주제로, 과거 활동했던 청소년활동가들을 만나고 있어요! 이번 호에서는 2001년 무렵 '학생인권과 교육개혁을 위한 전국중고등학생연합'에서 활동했던 김경묵 님을 만나 보았습니다. 김경묵 님은 현재는 영화감독으로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 인터뷰 진행 및 정리 : 공현, 피아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저는 영화를 만들고 있는 김경묵입니다. 예전에 만들었던 영화로는 〈줄탁동시〉,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가 있어요. 그 이후에는 병역거부를 하고 미국에서 미술 공부를 했습니다. 재작년에 한국에 돌아왔고, 작년에 개인 전시를 했어요. 그리고 지금은 또 다른 영화 제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하셨던 청소년인권활동은 무엇이었나요?

 

저는 사실 청소년인권 활동을 한 기간이 길지 않기도 하고, 성과가 딱히 없기도 해서 활동을 했다고 말하기 좀 애매해요. 하지만 청소년인권 활동은 제가 처음으로 학교 밖에 나가서 해 본 활동이에요. 중학교 3학년 때 웹진 만들기를 한 적이 있는데, 문화 기사를 쓰는 일을 했었고 그 활동을 통해서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을 알게 되었어요. 제가 그때 부산에서 살았는데, 부산 지역 연합을 ‘부학연’이라고 불렀어요. 원래부터 학교에 불편한 것이 많았고, 학교를 계속 다녀야 하나 하는 고민도 많았거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부학연에 관심이 생겼어요. 그때 단체에 먼저 계셨던 송지혜 님이 학교에 관련된 제 불만들에 공감을 잘해줘서, 지혜 때문에 활동을 시작했다고 해도 될 것 같아요. 2001-2002년쯤에 주로 부학연에서 활동을 했어요.

 

기억에 남는 활동은?

 

학생연합은 전국조직이고, 매해 아젠다(의제) 같은 게 있었어요. 제가 들어갔을 때는 ‘학교운영위원회 학생 참여 요구’가 그런 주요 의제라 그것과 관련한 활동을 주로 했어요. 부산 서면에서 전단지를 돌리고 온라인 캠페인을 하고... 학생 참여의 중요성을 알리고 요구하는 일이었죠. 근데 솔직히 저는 그 의제를 잘 모르기도 했고 학교운영에 참여하고 싶어서보다는 거기에서 만난 친구들이 좋아서 더 있었던 것 같아요.(웃음) 그때 그렇게 만난 친구들이 제가 가진 고민들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었어서. 거기서 만난 친구들이랑 아직도 연락하고 소식을 주고받고 있어요.

 

저는 사실 두발 규제 같은 주제에 대해 막 불만이 있던 사람이 아니었어요. 학교를 바꾸겠다는 대의가 저한테는 크지 않았거든요. 그런데도 학교를 비판하고 그랬어요. 학생연합에 그런 친구들이 주로 모였다 보니까.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가, 학생연합이 전국 단체이다 보니 1년에 한두 번씩 다같이 만났어요. 한번은 강릉에서 만났는데, 여러 지역에서 온 활동가들이 모여 리더쉽 트레이닝 같은 걸 했어요. 살짝 대학교 동아리나 운동권 문화의 일부 같았어요. 우리가 앞으로 뭘 할 건지 회의도 하고. 전국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던 게 인상 깊었어요. 교육이 불만이다 뭐다 학교에서 떠들 수는 있지만 깊이 있게 얘기를 나눌 사람은 딱히 없잖아요. 그런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게 좋았어요. 그 친구들 덕분에 학교 그만두고 나중에 여러 지역을 떠돌아다닐 때 그 친구들 집에서 머물기도 했고요.

 

 

청소년운동 이후에 어떤 삶의 경로를 밟아 오셨나요? 청소년운동의 경험이 삶에 어떤 영향을 줬나요?

 

저는 학교의 두발이나 복장 규제보다는 체벌이 견디기가 어려웠어요. 맞는 것을 보는 것도 너무 힘들었고, 그런 분위기나 문화가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게 견디기가 어려웠어요. 학교가 그런 분위기이다 보니 학생들 사이에서도 폭력적인 위계 같은 게 생겼는데, 그런 것도 되게 괴로웠어요. 이걸 어디 가서 얘기할 수도 없고. 같은 반 친구들에게 얘기하기도 좀 어려웠고. 학생연합 친구들을 만나서 다행이었죠.

 

그렇게 학교를 그만뒀어요. 자유롭게 떠돌다가 서울에 오게 됐고. 검정고시에 합격은 했는데 대학 진학은 안 했어요. 집안에서 학비나 이런 걸 도와줄 상황이 안 됐고, 학교란 시스템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도 했어요. 무엇보다 학생연합에서의 경험 덕에 학교 밖에서도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거든요. 굳이 대학이라는 사회가 정한 길이 아닌, 다른 나만의 관점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데 청소년운동 경험이 영향을 줬던 것 같아요.

 

서울에 오고 나서 영화를 많이 보면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영화 제작 워크숍에 참여해 스무 살에 영화를 만들고, 영화제에 돌면서 상영을 하면서 그 뒤에는 계속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어요. 상도 받고 하니까... 나도 영화 해도 되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20대 때는 영화를 계속 만들고 상영하고 그런게 주된 일이었어요.

 

30대가 되어서는 병역거부를 하면서 감옥에 수감이 되었고요. 병역거부도 사실 학교를 한번 그만둬봤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거부도 한번 해보고 나면 좀 쉬워지는 것 같아요.(웃음) 학교에서 제일 힘들었던 것이 폭력이었기 때문에... 폭력적인 공동체인 군대에는 도저히 갈 수 없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 사이에 제도가 바뀔까 기대도 했지만...

 

출소하고 나서부터는 바로 미국에 유학을 갔어요. 영화를 제작하면서 영상의 확장으로 뉴미디어 아트에 관심이 있었는데, 감옥에서 고민을 좀 하면서... 수감되어 있을 동안 한국을 뜨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해서. 공부를 하고 싶기도 했어요. 미국에서는 대학 학부 졸업 없이 바로 석사 과정을 밟았어요. 영상 활동 이력이, 현업 커리어가 있으니까 대졸자가 아닌데도 석사 과정에서 받아주더라고요. 하여튼 이 모든 짓거리(?)10대 때의 탈학교와 전국중고등학생연합에서 이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자신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간이 있었기에... 라고 해야 할까.

 

 

영화를 제작하실 때 청소년운동의 경험이 영향을 끼친 것이 있나요?

 

10대 후반에 예민하게 고민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보니, 처음 영화를 제작할 땐 한국의 나이주의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서로 친밀한 관계가 아니면 말을 안 놓는다거나... 약간의 부작용(?)으로 나이 많은 사람한테는 계속 반말을 하고, 권위적인 사람에게는 불친절하게 굴게 되기도 하고요.(웃음)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기도 했죠. 사람의 말이나 사고라는 건 한마디로 잘라 볼 수 있는 게 아니고 배경이 있는 것인데... 그때는 한마디 한마디를 예민하게 받아들이다보니까 자꾸 모든 것을 비판했던 것 같아요.

 

 

만드신 영화가 19금 판정을 받은 것이 이슈가 된 적이 있잖아요?

 

〈줄탁동시〉가 제한 상영 판정을 받았어요. 일반 상영을 못하고 지정된 곳에서만 상영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정말 등급 관련해서는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도 청소년 관람 불가 판정을 받았죠. 청소년보호법이 문제다, 비판하는 생각도 들고...

 

(관련 기사 : '이것이 우리의 끝이다'가 진정 '청불'입니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혹은 활동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활동가들에게) 청소년을 넘어가서도 계속 이 운동을 하시는 게 대단한 것 같아요. 당사자를 넘어가서도 이 문제의식을 이어가려고 계속 노력하는 것이니까요. 그 외로 할 말은 딱히..... ^^

그냥 자신을 잘 돌봤으면 좋겠어요. love yourself.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