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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게시글/어떻게됐대?

[9호] 청소년활동가와 노동 이야기

[9호] [어떻게됐대?] 내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

- 청소년활동가들과 노동 문제


 

 

어떻게됐대?

활력소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꼭지, [어떻게됐대?]는 청소년활동가들의 삶의 고민들을 다룹니다. 청소년활동가들이 운동만 하고 사는 것은 아니고, 살아가면서 노동이나 주거, 병역, 연애 등 다양한 문제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청소년활동가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운동 또는 자신의 활동가 정체성과 연관지어서 어떤 생각들과 선택들을 하며 사는지 소개하자는 취지로 기획하였습니다.

두 번째 주제는 '노동'입니다. 청소년활동가의 정체성을 갖고, 혹은 갖지 않으려는 마음을 먹고 노동하는 것은 어떤 일일까요?

지난해에 활기에서 한 '삐삐롱수다킹'에서 다룬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준비되었습니다.


 

 

 

내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회원

빈둥

 

 

 

활동을 했다가 그만뒀다가 다시 했다가 반복하기를 5년째, 본가에서 짐을 바리바리 싸서 나온 지 2년째, 그 삶 어디에든 알바가 있었다. 본가를 나오기 전엔 정신없이 보증금을 모았고 본가를 나온 후엔 정신없이 월세와 전기세, 가스비, 휴대폰 요금, 각종 생활비까지 벌고 있다. 주변 활동가들처럼 아등바등(?) 활동을 계속 하고 싶어서, 내 삶에 대해 더욱 고민하고 싶어서, 더 이상 본가에서 주는 용돈 가지고 그들의 요구를 듣고 싶지 않아서 편지 한 장 써놓고 나왔다. 그런데 어째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활동 의욕은 줄어들고, 옆에서 갈리고 있는 활동가를 도와주지 못 해 미안해하면서 변함없이 알바를 하기 위해 빌빌대고 있는 거지? 답이 없네 답이 없어!

 

집 나온 활동가의 걱정 보따리

 

내가 본가를 나온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본가의 억압과 간섭을 피해 활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알바를 했고, 보증금과 한 달 치 월세를 모으면 활동(청소년 운동)에 힘을 쏟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항상 보고 있던 건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카페도 아니었고, 집에 널브러져 있는 공부할 책들도 아니었다. 나날이 줄어드는 통장 잔고와 알바x과 알바x국 사이트였다. 날이면 날마다 휴대폰으로 내가 할 만 한 알바가 언제 뜨는지 늘 보고 있었다. 하루 내내 구인광고만 본다고 일을 잘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하루 이틀 안 보면 일은 구하기가 더 힘들었고 내가 이력서를 제출한다고 무조건 채용되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음의 여유가 활동에서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알바는 본가를 나온 이후에는 더더욱 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돈이 없으면 자취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자동으로 내 머릿속에서 알바냐, 활동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선택지를 만들었다. 그게 너무 짜증났지만, 그렇게 알바를 몇 번씩 버리고 모임에 참여하고 담당을 맡아가고 일주일이 넘어가니 통장에 잔고가 얼마 없다는 걸 깨닫고 종종 활동을 포기했다. 본가에 들어가기는 죽기보다 싫어서 알바를 해야 하는데, 알바는 잘 구해지지도 않고 구한다고 하더라도 며칠 일한 것으로는 며칠 지나면 남는 것이 하나 없었다. 모임을 몇 번 쉰 적은 있지만 자주 그럴 순 없었고, 모임에서 맡아간 일을 다른 누군가에게 넘겨주기도 힘들었고, 넘기면 너무미안한 마음을 가져가야했다. (살지 말라는 뜻인가..!)

 

결국엔 알바를 하면서 활동을 제대로 하기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돈을 벌면 활동하기 힘들고 활동을 좀 한다 싶으면 돈이 없고. 또 활동이라는 건 임금노동처럼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아서(모임 시작 시간은 정해져 있어도 끝나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고, 맡아간 일이 많으면 시간 쪼개서 하기도 힘든- 참 애매한 슬픔) 어떻게 병행해야 할 지 감이 안 잡혀 때때로 내가 맡아간 일을 놓쳐버릴 때가 많다. 시간을 잘 쪼개더라도 그대로 행동에 옮길 수 없을 때가 많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한 변명 같고, 그럴 때마다 나는 삶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알바를 구하면 될 줄 알았던 게

 

어쨌든 알바를 완전히 그만둘 수는 없을 것 같아 솟아날 구멍을 찾아봤다. 그것은 일종의 목표로서 어느 알바든 해보고 그나마 나의 적성을 찾아보자는 것, 그리고 사업장에서 활동과 관련한 나의 주장을 꼼꼼히 익혀가는 것(부제: 일반인 코스프레 해제)”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때의 나는 내 생활에서 열심히, 사업장에서 굳어진 차별들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생각해보게 하고 싶었다.

 

최대한 긍정 파워를 먹고 알바를 해보면 현재와 미래의 나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었다. 첫 번째 이유는 당장 내가 뭘 제대로 할 수 있는지, 알바를 통해서 배운 걸 활동에서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지금 내 꼬락서니를 봐서 활동과 알바를 하는 한계치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해 돈을 벌어서 먹고 사는 길이 참 막막하다는 기분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생각지도 못 했던 직종들의 알바를 많이도 해봤다. 인바운드 콜, 아웃바운드 콜, 은행 청원요원, 기업신용평가기관 신용평가 아르바이트, 세무서 종합소득세 안내도우미, 마트 시식행사와 과자진열과 세트 판촉, 술집 아르바이트, 도서관 사서도우미, 학회 안내데스크, 비엔날레 전시 보조, 리서치회사의 코딩 알바 등등까지.

 

솟아날 구멍에 대한 결과는 매우 예상 가능했다. ‘일코 해제는 나를 독특한 사람”, “참을성 없는 사람”, “위아래 없는 것등등으로 만들었다. 사업장에서 일어나는 불합리함에 대해 나의 주장을 잘 전달하는 것보다 상처를 많이 받은 날로서의 의미가 컸다. 분명 나는 많은 직종들의 알바를 경험했고, 그래서 일면 나를 잘 알아갔다고 생각하지만, 기분이 너무 좋지 않았다. 내가 이 사회의 많은 임금노동의 직종들과 맞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잘 맞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암담했던 미래가 더 암담해지는 기분을 느꼈기 때문이다. 동시에 백 번 천 번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내 탓을 하지 않으면 나는 언제나 제자리일 거라는 강박이 생겼다. 여러 장소에서 갖가지 알바의 경험이 늘수록 이 느낌은 나에게 더욱 더 깊게 자리 잡아갔다.

 

어떻게든 이 나쁜 기분을 떨치고 싶어 왜 그런 지 되짚어봤다. 나는 늘 혼자문제적인 상황에 문제제기 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늘 이상한(잘못된, 혹은 싸가지 없는) 사람이 됐고, 하지만 현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제일 직급이 낮은 사람은 알아서 기는 게(차별을 참아야 하는 게) 너무도 당연한사회였다. 그 속에서 나는 사업장을 종종 버티지 못 하고 나왔다. 주변 사람들에게 구구절절 고통을 호소했지만 내가 다시 일을 구했을 때 내가 조금만 참으면 되는 것처럼 이번엔 오래 좀 일 해봐.”라고 가볍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젊은 사람이라 끈기가 없는 게 아닌데 상처는 지워지지 않았다.

 

끈기는 누가 정하는가? 구조적으로 끈기는 계급사회에서 낮은 계급의 사람들을 부려먹을 대로 부려먹을 수 있는 좋은 말이다. 예를 들어, 임금노동을 할 때 요즘 젊은 사람은 끈기가 없어~”라며 오기로 사업장에 남아있게 만들고, 노동 강도가 높아도 젊은 사람이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야지~”라고 한다든지, 임금노동 미덕은 끈기이기 때문에 견딜 수 있어야 다른 힘든 일도 잘 해나갈 수 있는 것이라고 끊임없이 말한다. 사업장에서 직장 상사가 틀린 말을 하면 그것은 직장 상사가 했기에 맞는 말이었고, 손님이 성희롱을 해도 융통성 있게(?) 미소 짓는 게 프로 정신이었고, 나이가 적다고 반말하고 하대하는 게 윤리의식이었고, 같이 일하는 직원이 차별 대우를 당하는 건 무시해야 하는 일이었다. 내가 했던 임금노동들의 공통적인 목표는 언제나 윗사람비위 맞추기였던가.

 

무시하거나 애써 미소 짓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나는 언제나 결국엔 해야 할 말을 해야만 했다. 그래야 바뀔 수 있다고 믿으니까, 최소한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 하나쯤은 필요하니까. 물론 사업장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의 이런 태도와 문제제기를 싫어했다. 비슷한 처지에, 똑같은 차별 대우를 받은 사람들까지도 그랬다. 나는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내가 그 참을성이 생각 이상으로 없다는 것을 몇 번이고 절실하게 느끼고 마지막에는 종종 조금만 참아볼 걸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언제 또 일을 구하냐라고 나에게 되묻게 되는 게 서글펐다.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은데

더는 생계유지를 위해 저임금노동을 하고 활동을 병행하며 사업장에서의 감정노동을 견디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잘 모르겠다. 정말 잘 모르겠어서 잘 모르겠다. 모아둔 돈은 없는데 빠져나갈 구멍은 넘쳐나고, 내가 평생 알바를 하면서 먹고 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구조적으로도 불가능에 가깝고(내가 50대가 되었을 때 알바로 채용해주지 않을 확률이 높으니까), 내가 실업 상태에서 활동을 계속하는 것 역시 불가능해 보인다. 결국엔 내가 활동을 하더라도 내 밥그릇은 내가 찾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청소년 운동에서 활동가들이 서로가 서로의 경제적 기반을 유지시켜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당장 내가 활동하는 단체는 돈이 없어 상근자도 두지 못 하는 실정이다.

 

10대 후반에 활동을 시작한 나는 이제 20대 중반에 들어섰다. 나이가 임의적인 제도의 산물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이가 들면 일자리를 구하기가 힘들 거라는 불안함이 머릿속에 맴돌고, 각종 스트레스를 받으며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는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꽉꽉 메웠다. 물론 어느 임금노동이든 나는 언제나 참을성 테스트를 해야겠지만, 감정노동은 겁나게 하고 임금은 최저로 받으면서 2000원짜리 초코우유를 사먹을까 말까 고민하고, 담배를 아껴 펴야겠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임금을 최저임금보다는 많이 받아서 활동하는 단체에 후원을 할 수 있는, 금전적인 여유를 만들고 싶다.

 

단순히 나의 바람만 꽉 찰 뿐 생계와 활동이 얽히고설킨 것을 풀지 못 하고 있다. 단체 내에서, 단체의 지부 내에서 서로가 생계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일을 제 때 못 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질책하고 싶지도, 질책 받고 싶지도 않다.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걸까. 우리의 운동을 잘 해나갈 수 있게 하면서 생계까지 보장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어떤 것을 해야 할까. 최저임금 1만원 운동과 청소년의 경제적 권리 보장을 함께 외치는 운동을 해야 하는 걸까, 청소년 운동에 힘이 돼달라고 CMS를 모으러 이곳저곳 떠돌아야 하는 걸까, 운동과 활동가들의 생계유지를 할 수 있는 사업을 만들어내야 하는 걸까. 미래에 대한 갑갑함과 현재의 위태로움을 어떻게 극복해나갈 수 있을지 여러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