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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게시글/어떻게됐대?

[8호] 청소년활동가와 병역 이야기

[8호] [어떻게됐대?] 살아남은 자의 기억 혹은 변명 & 삼켜야 했던 아이의 언어

- 청소년활동가들과 병역 문제


 

 

어떻게됐대?

활력소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꼭지, [어떻게됐대?]는 청소년활동가들의 삶의 고민들을 다룹니다. 청소년활동가들이 운동만 하고 사는 것은 아니고, 살아가면서 노동이나 주거, 병역, 연애 등 다양한 문제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청소년활동가들이 어떤 고민을 하고 운동 또는 자신의 활동가 정체성과 연관지어서 어떤 생각들과 선택들을 하며 사는지 소개하자는 취지로 기획하였습니다.

첫 번째 주제는 '병역'입니다. 청소년활동가들 중에는 군필자도 있고, 병역거부자도 있고, 병역에서 면제 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루블릿님과 수수님, 두 명의 글을 실어보았습니다.

지난해에 활기에서 한 '삐삐롱수다킹'에서 다룬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준비되었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기억, 혹은 변명>


루블릿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서울지역모임 활동회원)

 


  한국 사회에서 군대를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은 20대 초반의 남성에게 군대는 1년에 한 번 받는 예비군 훈련이 아닌 이상, 더 고민을 만들 일은 없다. 과거 국가가 나를 착취했다는 기억은 잊은 채 그저, 일찍 다녀온 사람들의 여유를 부리며, “내가 군대에서 있을 땐 말이야~”로 시작하는 전형적인 멘트를 뱉거나, 아직 가지 않았거나 혹은 갈 일이 없는 사람을 향해 군대도 가지 않은 것들이..”하며 쯧쯧거리기만 할뿐. 1년에 한 번 있는 예비군 훈련은 귀찮을 뿐이지 어렵거나 힘들지는 않았으며, 더군다나 민간인인 예비군을 현역인 군인이 어떻게 통제하거나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예비군 훈련장은 평화롭거나 때로는 나른하기까지 했다. 아빠는 나를 볼 때마다 거듭 말하곤 했다. 네가 편법을 쓰거나 공익을 가거나 하지 않고 육군 현역으로 군대를 다녀온 건 정말 잘한 일이라며, 자긍심을 가지라고. 사실 나 또한 전역한 이후 군대에 대해서, 병역에 대해서 적어도 내가 짊어지고 있던 크나큰 인생의 걸림돌을 하나 해치웠고, 더는 고민할 일 같은 건 없다고 생각했고, 그건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심리학에서는 노력 정당화라는 개념이 있다. 쉽게 얘기하면 내가 큰 고생을 했거나 엄청나게 노력을 쏟아 부은 일을 더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하는 것. 만약 그 일을 헛짓거리였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아마, 내가 한 고생이 의미가 없었다고 하면 남는 건 그걸 도대체 왜 했냐는 의문과 허무함뿐인데 그걸 견뎌낼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얼마나 있을까. 한국사회에서 징병제는 거의 대다수의 남성들이 예외 없이 19개월에서 2년 가까운 시간을 무의미하게, 그리고 무가치하게 보내게 만든다. 국가가 남성들을 착취했지만, 남성들은 자신들이 겪었던 사건과 시간에 대해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고 말하기 보다는 그래도 세상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좋은 경험이었다고 말하며, 도리어 국가보다는 여성과 군대에 가지 않는 남성들을 향해 분노를 표출한다. 그 사람들이 자신이 군대에서 겪었던 일들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인정조차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기서 자유롭지 못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행정병을 하면서 여러 가지 얻은 것들이 많고, 또 폭력적인 군대 안에서 살아남았으며, 그 안에서 그나마 폭력적이지 않고 평등한 공간과 관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며.

 

  난 20111219일의 기억과 2012320일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한다. 각각, 입영신청을 하던 날과 입대를 하던 날.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날들은 그보다 더 많다. 처음 자대로 전입했던 때, 동물원 안에 있는 동물들을 바라보듯 달려들었던 선임들과, 때렸다고 찔러도 증거 없으면 영창 안 가. 너 내가 때리면 티 안 나게 얼마든지 때릴 수 있어 개새끼야.” 하던 맞선임과, 잘하지 않는다며 밥을 먹으러 가던 길에 내 엉덩이를 발로 걷어찼던 맞선임의 바로 윗선임과, 그것 때문에 징계를 받게 되었다며 나에게 되려 화풀이하려 했던 이들에 대한 기억 등등, 아이러니하게도 기억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더 기억나는 것들. 그리고 똑똑히 보았다. 나와 함께 같이 이등병 시기를 견디며 내가 선임이 되어서는 정말 저러지 말아야겠다.”하던 이들이 그 당시 선임들의 말마따나 너도 선임되면 똑같이 할 걸?”대로 하던 모습을.

 

  입대하기 전, 그런 두려움이 있었다. 다른 군대를 다녀온 한국 남성들의 대다수처럼, 폭력의 가해자가 되거나, 혹은 폭력의 희생자가 될 까봐. 다행스럽게도, 다친데 없이 19개월 동안 죽지 않고 살아남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만, 난 내가 용서받지 못한 자가 아니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는 못한다. 내가 있던 행정병이라는 위치의 특성상, 다른 사람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거나 위협하지 않아도, 내가 가지고 있는 권한과 중대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중대장 및 행정보급관)의 결정에 충분히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였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대배치 받았을 때부터 함께 했던 동기들, 그리고 후임들이 변해가는 것을 함부로 왈가왈부하지는 못하겠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과연 저러지 않았을까하는 아찔한 생각이 들기 때문에.

 

  물론 어쩌면, 입대하기 전에 가졌던 그 두려움이나, 동기와 후임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함부로 왈가왈부하지 못하는 거나 모두 그럴듯한 합리화일지도 모른다. 내 의지로 그 안에서 폭력들에 저항하고 견뎌내며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는 건 없다며 체념하며 변명하고 더 나아가 더 이상은 기억하지 않으려고 하는 건지도 모를 테니까. 21개월을 삶에서, 그리고 머리속에서 지워내버리지 않으면 나 또한 그 시간들을 정당화하며 그에 대한 마땅한 보상을 군대에 가지 않거나 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찾는 수많은 평범한 한국 남성이 되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삼켜야 했던 아이의 언어’
-청소년운동이 병역거부운동과 함께 여기저기를 기웃거려야 하는 이유.



수수

((아직)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활동회원)



(슬픔) 글을 좀 대충 썼습니다. 더 많은 이야기는, 더 많은 원고료를 주신다면 토해내보도록 하겠습니다(...) 혹은 우리, 만나서 이야기 나눠보도록 합시다.



  군대와 나의 삶은 참 거리가 멀었다. 나는 여성이었기에 군대에 갈 일이 없었고, 아직 어렸기 때문에 주변에 군대에 가는 이들도 별로 접할 수가 없었다. 나의 부친은 종종 “너 그렇게 깨작깨작 밥을 먹으면 군대에서는 큰일난다.”며 남동생을 겁줬지만, 실은 눈이 나빠 공익 생활을 했었기에 우리 집안에 군대의 그림자가 직접적으로 드리우는 일도 드물었다. 그래, 나는 전쟁과 군대에 반대했었고, 2년이라는 귀중한 인간의 인생을 아무것도 아닌 곳에 강제적으로 허비시키는 징병제가 싫었다. 하지만 막연한 감정과 구체적인 고민은 꼭 같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인권운동을 하게 되고, 주변에서 함께 활동하던 이들이 슬 영장을 받고, 군대냐 병역거부냐를 고민하게 되는 그 시점에서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군대와 나의 삶을 연결해보게 되었다.



기존 사회에 순응시키는 군대라는 기관

  내가 군대에 갈 일이 없지만서두, 가만 생각해보면 군대와 나의 삶은 뗄 수 없다. 군대는 학교와 더불어 한국 사회의 가장 크고, 유효한 사회화 공간이다. 사회화란 한 인간이 그가 속해있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잘 기능할 수 있도록 해당 사회에 익숙해지게, 녹아들게끔 하는 과정을 말한다. 사회는 주로 비청소년, 남성, 부유층의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렇기에 사회화는 흔히 이런 지배와 기존 권력들에 순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쉽다. 학교는 아직 가정과 또래집단 이외의 ‘기존 사회’에 익숙지 않은 어린이 청소년들을 의무교육이라는 이름 아래에 모두 데려다, 그 사회가 원하는 인재로 기능할 수 있게 하는 교육을 시행한다. 이때의 교육은 아까 언급했듯 이미 만연한 지배와 권력들을 몸에 배게 만든다. 말이 어려운데, 좀 예를 들어 풀어보자. 우리는 아무 이유도 없이 노인을 공경하자는 도덕을 도덕 교과서에서 습득한다. 국기에 대한 맹세와 애국가를 무비판적으로 되뇌이며, 나라를 사랑하라는 메시지도 익혀야만 한다. 원자력 발전이 얼마나 ‘효율’적인지도 학습한다. 생태적 가치보단 이윤이 먼저임을 공부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들은 “의무”라는 이름으로 강제되고 있다. 십여년간의 의무교육 아래에서 시민들은 이런 이데올로기를 학습해야만 하는 것이다.


  군대 역시 학교와 마찬가지의 ‘사회화’ 기관으로서 기능한다. “나라를 지킨다”,는 말은 사실 허울좋은 말일 뿐이다.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군대에 다녀온 남성들은 자신의 소중한 시간이 얼마나 하찮고 어이없이 소모되었는지에 대해 주구장창 이야기한다. 강제로 빼앗긴 2년은 “나라를 지켰다”는 허울 좋은 말로 간신히 위안된다. 그렇다면 성인 남성들이 군대에서 실제로 습득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와 같은, 많은 지배 이데올로기들이 몸에 새겨진다. ‘돈이 없는 자들은 현역으로 “구른다”’. ‘실상 가장 비효율적인 상황에서 효율성을 가장 좇는 것처럼 보여야한다.’ 이는 벗어날 수 없는 자본주의의 이치이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게는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복종과 충성을 맹세한다.’ ‘이 모든 것은 국가를 위한 것이다.’ 맹목적으로 국가만을 위해 자신과 비판을 버리는 국가주의적 사고이다.




그런 군대가 빚어내는, “아이는 사람이 아니다”는 생각

  그런데, 그래서 뭐? 원래 사회의 어떤 곳도 이런 ‘지배’와 ‘권력’에서 벗어날 수 없지 않니? 어느 공간이 완전무결하게 평등하고 인권적이겠어? 군대한테만 너무 심한 비난을 하는 건 아냐? 라는 질문이 물론 머릿속에 떠오를 수 있다. 특히, 저 지배이데올로기들과 청소년은 도대체 무슨 상관이지? 라는 질문이 가장 마음에 돌부리처럼 자리잡고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학교와 군대가 강제하는 지배이데올로기의 습득, 즉 ‘사회화’가 과연 좋은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잠시 미뤄두고, 이렇게 생각해보자.


   학교가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조금은 더 평등한 사회화 공간이라면, 군대는 그 사회화의 대상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또다른 문제를 낳는다. 학교교육은 특정 나이대의 모든 시민이 겪어야만 하는 일이라면, 군대는 학교를 거친 “성인 남성”이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관문을 넘어야 철없던 “아이”는 드디어 “사람”이 되어 돌아온다. “진짜 사나이”, 곧 “어른”이 말이다. 이는 곧 “아이”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한국사회는 나이를 잣대로 성숙한 인간인 성인과 미성숙한 인간인 미성년자를 나눈다. 그리고 이 단순한 잣대에 따라 여러 규제와 인권침해가 일어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군대를 다녀왔느냐, 다녀오지 못하였느냐는 당신이 “아이”인지, “사람”인지를 나누는, 청소년인권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성인 남성만이 경험하는 군대라는 통과의례는 여성과 어린이·청소년을 배제한다. 무쓸모한 2년을 보내며 성인 남성은 “나라를 지킨다”는 위안과 더불어, “우리는 나라를 지킴과 동시에, 우리나라의 여자와 아이들도 보호한다.”는 생각까지 가지게 된다. 왜, 우리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는 ‘군인 아저씨’에게 열심히 힘내시라는 편지를 적어보내야 하지 않았던가? (물론 이 ‘보호’라는 상냥한 말의 이면에는 여자와 아이들에 대한 무시와 혐오, 박탈감 등의 질척한 감정이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자.) 그리고 이는 반여성적임은 물론, 그에 덧대어 청소년보호주의적인 이데올로기이다. 그렇다고 여성과 어린이·청소년을 포함시키자고 주장하는 것은 너무도 일차원적이다. 군대에서 이루어지는 무수히 많은 지배이데올로기의 전파, 그리고 군대가 만들어내고 있는 전쟁과 폭력 등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청소년운동과 병역거부담론이 다같이 손을 잡고 이리저리

  그렇다면, 전쟁을 만들어내는,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진정한 어른”, 즉 “사람”이 되게끔 하는 이 군대라는 통과의례를 거부하는 것은, 아직 군대에 갈 일이 없는 청소년에게도 상당히 필요한 일이 아닐까. 군대와 전혀 연이 없어 보이는 청소년운동에게 있어서도 말이다. 청소년운동을 “미래”의 병역거부 가능 집단으로만 여기자는 것은 아니다. 청소년운동이 왜 병역거부 운동과 연대해야 하는지, 함께 손을 잡고 이리 저리 탐색해보자. 청소년운동은 물론, 기존 병역거부 담론의 확장을 고민해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