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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16호] [사람들] "그 땐 이렇게 오래할 줄 몰랐는데..." 청소년운동에 10여년째 몸 담그고 있는 공현과의 인터뷰 (1)

[16호] [사람들] "그 땐 이렇게 오래할 줄 몰랐는데..." 청소년운동에 10여년째 몸 담그고 있는 공현과의 인터뷰 (1)



'사람들' 코너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청소년운동을 했던, 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청소년운동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윤곽을 그리는 코너입니다. 구술된 과거에 대한 해석은 인터뷰이의 주관이 개입되었을 수 있습니다. 사실관계에 대한 이의제기는 활력소로 연락주세요!


2017년에 활기의 활동 계획을 논의하면서 소식지 <활력소>도 작게 개편했습니다. 먼저 '소식들' 코너와 '목소리들' 코너를 하나로 합치고, '사는 이야기' 코너를 신설했어요. '사는 이야기'는 청소년활동가로서 스스로를 정체화하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의 고민, 삶에 대한 이야기(에세이)를 기고받아 싣습니다. '사람들' 코너에서는 청소년운동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볼 수 있도록 개인 활동가의 인터뷰를 통해 청소년운동의 의미에 대해 살펴볼 예정입니다. 기존에 진행하던 단체 활동 소개 인터뷰도 함께 진행할 수 있도록 고민 중입니다. '관점들' 코너는 기존의 '덕질들' 코너가 전환된 것으로, 그 동안 다뤄온 것처럼 책, 영화, 방송, 미디어 등을 청소년인권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코너입니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조금 더 비평/칼럼의 성격으로 바뀐 점입니다. 그리고 이번 호부터는 활기의 재정 내역을 활력소에 싣지 않습니다. 청소년운동 전반의 소식을 담은 웹진이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재정 보고/결산은 활기의 후원인 분들께 별도로 발송됩니다!  

개편을 준비하면서 발행이 조금 늦어졌습니다만, 최대한 규칙적으로 발행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찾아올 새로워진 <활력소>가 청소년운동에 '활력소'가 되길 바라며,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 난다 (편집담당 / 청소년활동기상청 '활기')



  공현과의 인터뷰는 매우 긴 시간이-거의 여섯 시간 정도가-걸렸다. 2005년부터 시작된 공현의 청소년운동은 현재진행형이고, 이 글에 담을 수 있었던 내용은 2005년부터 2008년까지 공현이 했던 활동 중 일부일 뿐일 것이다. 이 글에 싣지 못한 2009년부터 2012년까지의 내용은 다음 글로 실을 예정이다.


  공현을 인터뷰한 본인은, 2011년부터 청소년운동에 발을 들인 사람으로서 지금은 공현과 같은 단체에서 함께 일을 하고 있다. 일에 대한 것이든 사적인 이야기든 대화를 안 나누고 사는 사이가 아님에도 인터뷰를 하면서 처음 듣는 이야기가 많았다. 공현은 종종 2005년부터 쌓인 자신의 청소년운동 역사를 공유할 사람이 없다고 푸념을 하는데, 또 그러한 상황이 자신이 쌓아온 역사의 무게이려니 생각한다고도 이야길 한다. 나는 공현이 청소년운동을 해온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되었으면 좋겠다. 당연한 듯 주어진 억압을 깨기 위해 별종처럼 취급받는 우리 청소년활동가들의 목소리와 헌신이 역사로 남길 바라기 때문이다. 


- 인터뷰어 쥬리의 말





 

 나는 88년에 서울에서 태어났어. 서울에 살다가 초등학교 2학년쯤 전라북도로 이사를 갔고, 아빠가 대구에서 한의원 개업을 해서 중 3때 대구로 이사를 갔어.

  

내가 전학 간 중학교가 대구에서도 좀 외진 곳이었는데, 학교가 두발규제도 빡세고 체벌도 심했어. 당시엔 내가 느끼는 불만들이 언어화돼서 이건 이래서 잘못됐다는 의식이 있었던 건 아니고, 예를 들면 어떤 교사가 시험범위 중에 아무거나 물어봐서 3초 안에 대답 못하면 때리는 식으로 구두 쪽지시험 치듯이 했던 적이 있는데 그런 거 너무하다, 그런 생각을 했었어.


"등교시간 학생의견 반영하라"


 2003년에 고등학교를 전주 상산고로 갔어. 나 때가 자사고 1기였지. 부모님이 대구 고등학생들 다니는 거 들어보면 나는 대구 고등학교로 가면 못 견디고 때려치울 거 같다고 상산고를 권유했어. 그땐 자사고가 어떤 모델인지 아직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고 자사고의 교육내용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애매모호했던 시기였어. 그 때 상산고에서 내세웠던 건 양서읽기, 철학·인문학 수업으로 마케팅을 했었어. 그 때 운동사회나 정치권에서 자사고 관련해서 논란이 됐던 건 입시경쟁 문제가 아니라 귀족학교다, 학비가 많이 든다 라는 게 주 논란이었어.

 

 상산고도 두발복장규제 했고, 야자 강제로 시키는 교사들이 있어서 싸우기도 했어. 난 결국 야자는 거의 안 했어. 강제로 안 시키는 교사를 만나거나, 학원 간다고 하고 실제론 학원은 좀 다니다 말고 안 하거나 했지. 3학년 때 교사는 강제로 시키는 교사였는데 나한테 야자 안 할 거면 어디서 무슨 공부할 건지 계획을 제출하라길래, 나는 제가 어디서 뭘 할지는 그날그날 다르고 제 맘이기 때문에 선생님한테 말할 이유가 없는데요그랬지. 그렇게 학기 초부터 4월까지 싸웠는데 나한테 질렸는지 그냥 야자를 빼줬어. 체벌도 있었어. 떠들었다고 때리고, 휴대폰 안 냈다 때리고. 두발단속 걸리면 잘라 오라고 말하기 전에 꼭 한 대씩 패고. 영어교사 한 명은 개학했으니 기념으로 한 대 맞자 하고 때리기도 했어. 중간고사 끝나면 틀린 문항 개수대로 때리기도 했고. 활동하면서 체벌 감수했던 것도 있었는데, 학교가 3학년 등교시간을 일방적으로 720분으로 당긴 거야, 원래 740분이었는데. 내가 그거 항의하면서 스케치북에 등교시간 학생의견 반영하라 써서 들고 등굣길에 있었어. 그랬더니 교문지도 하는 교사가, 너 지금 20분이 지났는데 안 들어갈 거면 지각한 학생들처럼 앉았다 일어나기를 하래서 나는 그 스케치북 들고 앉았다 일어났다 이백 몇 번쯤 했나.

 

2005, 청소년운동을 만나다

 

 청소년운동이란 게 있다는 걸 안 게 내가 3학년이었던 20054, 5월이었는데, 두발규제·내신등급제 반대 촛불집회가 신문에도 나고 포털에도 떠서 그 때 사회운동이라는 게 있단 걸 알았어. 그래서 인터넷 사이트 들어가서 찾아보고 그랬어. 2005514일 집회에 가봐야겠다 결심하고 찾아봤는데 전주 지역에 집회가 없었어. 서울, 광주, 대구에서 하길래 광주가 한 시간 반 거리니까 고속버스 타고 광주를 갔어. 근데 광주 가보니까 집회가 없는 거야. 집회 취소된 걸 도착해서 인터넷 찾아보고서야 알았어. 당시 광주에서 집회 준비한 단위가 집회조직 능력이 없었던 거지. 인터넷으로 찾아보니까 집회 취소하고 토론회를 한대서 그 토론회로 갔어. 토론회 장소는 광주 YMCA였고, 서너 명이 발표를 하고 여러 사람들이 앉아서 얘기하는 분위기였어. 토론회에서는 두발규제 부당하다, 어떻게 없앨까 그런 얘기들 나왔고. 나도 발언 했는데, 전주에서 집회 참여하러 왔는데 집회가 없어서 당황했다고, 그리고 학생들이 학교 안에서부터 아래서부터 운동을 해야 두발규제가 없어질 거라고 발언을 했어. 토론회 끝나고 광주 YMCA 청소년인권센터에 김현이라는 상근자가 명함 주고 나도 연락처 주고 그랬지. 그 사람이랑 연락해서 그 바로 다음 주인 521일에도 한 번 광주에서 청소년인권문제 어떻게 해결할지 논의하는 워크숍이 열렸는데 초대를 받아서 참석했어. 워크숍 때 그 얘길 처음 들은 거 같은데, 청소년인권문제가 사실 끊임없이 제기가 되어 왔고 두발자유 운동도 2000년에 있었고 2004년에 종교자유 문제나 체벌 문제도 제기되고 그랬는데 해결이 안 되고 몇 년 지나 다시 제기된다는 것, 그런 해결 없는 반복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런 토론을 했던 기억이 나.


 당시 서울에선 두발규제철폐를위한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가 꾸려졌고 시민회단체들이 붙고 사람이 많아서 집회를 두 번 했어. 서울에서도 두발자유 운동이 순탄하진 않았고 준비 과정에서 아이두아수나로, 인권운동사랑방 등이 결합했던 시민사회단체 측 간에 갈등이 있었다고 나중에 들었. 아이두에서는 성인들은 뒤로 빠져라요구하기도 했고 두발 자유자율이냐 그런 걸로도 싸웠다고 하고. 결국에 서울 쪽 집회는 아이두 쪽 집회랑 시민사회단체 쪽 집회를 나눠서 같은 날 시간 다르게 진행했어.


 그 무렵에 아수나로는 청소년인권연구포럼 아수나로’(아수나로)였는데 권오범, 조상신 등 비청소년들이 주축이었지. 조상신은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의 마지막 세대 대표격이었는데 조상신이 2003년 군대를 가서 그 뒤로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은 없어졌어. 조상신은 2004년 말쯤 제대를 하고 아수나로를 만드는 데 주도했지. 조상신에게는 청소년인권운동이 안 되는 게 이론과 축적된 경험이 없어서라는 생각이 있어서, 전국중고등학생연합 활동했던 자료 정리하고 이론을 만드는 역할을 해보자 하고 예전 활동했던 사람들이랑 자기랑 비슷한 연배 사람들을 아름아름 모아서 청소년인권운동을 연구 지원하는 조직을 만들자 해서 만든 게 아수나로야.

 

"우리가 잃을 것은 족쇄뿐입니다"


 광주에서 처음 청소년운동 행사에 참여해보고 다시 전주로 돌아와서, 나는 전주에선 뭘 할까 하다가 집회나 하자는 생각을 했어. 집회를 같이 주최할 만한 단체를 여기저기 물어봐서 전북평화와인권연대를 찾았어. 거기 찾아가서 활동가 만나서, 내가 이런 집회를 하려 한다고 했더니 전주에 청소년인권 운동하는 데가 없대. 없으면 만들어야지, 집회를 해서 사람을 모아보자고 이야길 했어. 집회는 8월로 잡았어. 주최는 그냥 나였지 뭐. 주장한 내용은 두발자유랑 학생회 법제화, 학교운영 참여보장. 두발자유가 인권문제 상징 같은 거였고. 전북평화와인권연대가 집회 신고 같은 실무를 맡아주고 내가 집회기획하고 전단지 만들어서 학교 끝나면 주변 학교들 가서 뿌리고, 보충 끝날 때쯤 가서 뿌리고 그렇게 홍보를 했어. 난 보충 안 했으니까 끝나자마자 다른 학교를 가서 보충 끝나는 시간 맞춰 배포할 수 있었지. 전단지 돌리는 걸 도와준 사람들이 있었어. 같은 학년에 세 명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문제의식에 동의해서 해주는 사람들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동의도 했지만 나랑 친한 탓에 해주기도 했지.

  




 근데 웃긴 건 전단지에 정작 집회 장소를 안 썼어, 시간만 쓰고. 왜 안 썼냐면, 서울이랑 광주 집회할 때 장학사랑 교사가 근처에 대기하다가 참여하는 학생들 못 오게 한 게 많았거든. 지하철 입구에 네다섯 명 배치되어서 교복 입은 사람 잡아서 돌아가라 그러고. 그래서 그런 일이 있을까봐 전단지에 장소를 안 쓰고 참가한 사람은 카페에 글을 남기거나 연락을 달라고, 그럼 장소 알려주겠다고 했어. 경찰에 집회신고도 했으니까 경찰이 학교나 교육청에 알려줄 거 아냐, 근데 그 땐 경찰이랑 학교랑 내통할 줄 생각을 못 했지. 전단지에 장소를 안 써서 그런지 학교 앞에서도 뿌리고 거리에서도 뿌렸지만 전단지 받고 집회 온 사람은 없었어. 참여자들은 내가 아는 사람들이랑, 그리고 당시에 청소년문화의집에 내가 가서 홍보하다가 알게 된 사람들이 풍물패 공연도 해줬는데, 그 문화의집에서 온 사람들만 있었어. , 아이두 홈페이지에 전주에서 두발자유 집회한다고 홍보물 올렸더니 아수나로 권오범이 연락도 왔었어. “우리가 만든 뱃지랑 전단지 있다, 집회 때 참여해도 되냐묻길래 좋다고 그랬지. 아수나로 사람들이 집회 전날부터 전북평화와인권연대 사무실에서 실무 준비도 같이 하고 집회 뒤로도 연락하고 지냈어. 그런데 집회가 사람도 얼마 안 왔지만 심지어 시작하고 30분 만에 비가 쏟아져서, 빨리 끝내고 같이 밥 먹고 헤어졌어. 두발자유 구호를 좀 외치긴 했지. 발언도 돌아가면서 하고. 장학사들이 오긴 왔는데 특별히 참여를 제지하진 않았어. 아마 전북평화와인권연대 활동가들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워낙 사람이 적으니까 그랬나. 물론 혹시 모르지, 전단지 받고 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근처에서 붙잡혀서 되돌려 보내졌을지. 그렇게 집회가 망해서 집회 끝나고 엄청 울었는데.

 

전북청소년인권모임 만들다

 

 집회 하고 여름방학 중엔 별거 안 하고 있다가 개학하고 나서, 전단지 같이 뿌리고 집회 왔던 사람들이 그래도 뭐 하나 만들자 해서 전북청소년인권모임이라는 걸 만들었어. 구성원은 상산고 3학년 둘, 2학년 대여섯. <인권은 교문앞에서 멈춘다> 이런 책 읽고 세미나 하고, 11-12월엔 교육청 앞 1인시위도 했어. 이따 만한 냉장고 박스 가져다가 종이 붙이고 창살모양 내서 한 면은 두발자유 한 면 학생회법제화 한 면은 청소년보호법 반대 써서 교육청 앞에서 시위했어. 청소년 보호법 얘기한 건 그 때가 셧다운제가 처음 국회에서 얘기나올 때라서. 113학생의날 즈음 ‘21세기청소년공동체 희망’(희망)에서 두발자유 뱃지를 만들어 팔았는데 그걸 우리 돈으로 천 개 사서 학교에서 배포하기도 했어.

 

 전북청소년인권모임에서 만든 게 청소년자유언론 <오답승리의희망>이야. 만들게 된 계기가 뭐냐면, 학교 신문부에서 만드는 신문에 글이 펑크가 났거든. 근데 신문부가 나한테 땜빵 해달라 그러길래 내가 교장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줬어. 교장이 훈화할 때는 자율이 어쩌고 시민의식이 어쩌고 하지만 학교의 규칙은 왜 이렇게 엉망이냐, 그런 내용으로 썼는데 그 학교신문부에서 못 싣겠다는 거야, 급히 부탁해놓고서는. 그래서 이렇게 학교신문이 검열을 당하는 문제를 항의하면서 만들었지. 기획은 그 해 11월부터 했는데 창간호 나온 건 2월쯤이야. 8호인가 9호부터는 책자로 만들었는데 그 전엔 그냥 흑백 종이였지. 모임 구성원들이 사비 털어서 만들었으니까. 12만원 들여서 천 부 찍고 그랬어. 2006년에 전북청소년인권모임이 청소년인권모임 나르샤로 전환을 했는데, 나르샤가 해산한 뒤에도 <오답승리의희망>2013년까지 계속 냈어. 나를 포함해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계속 만들었던 거지. 1년에 두 번 내는 걸 목표로 했어. 나 졸업하고 나서 전북청소년인권모임(이후 나르샤)은 계속 지속되다가, 구성원 수가 줄어들수록 학교에서 만만하게 보고 탄압을 더 하기도 했고 더 이상 인적 재생산이 안 돼서 해산했어.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의 시작

 

 나 때는 청소년운동에 대학거부라는 개념이 없었어. 개인적으론 대학 가는 거에 문제의식은 있었는데 대학가는 거 자체보단 명문대를 가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지. 그래서 부모한테 대학 지원을 전북대, 성공회대로 하겠다고 했었어. 그래서 엄청 싸웠지. 부모한테 어떤 소리도 들었냐면, “너 좋아하는 여자애가 전주에 있으니까 전북대 쓰는 거냐이런 소리도 들었어. 날 순정파로 오해한 거지. 난 그런 캐릭터가 아닌데. 그렇게 부모랑 싸웠는데 내가 별로 확신이 없기도 했고, 수능 잘 봤으니 소위 명문대를 쓰라고 부모는 그러고. 결국 수능이랑 논술 봐서 00대를 갔어. 나중에 대학거부 자퇴할 줄은 몰랐지, 당시엔.

 

 2005년 수능 치고 직후에, 아수나로에서 11월에 집회한다고 그래서 서울에 갔어. 근데 거기는 심지어 전주에서 내가 한 집회보다도 사람이 적게 왔어. 집회 주제는 두발자유였는데 한 열 명 왔나. 당시 아수나로 서울 멤버들이 집회 준비를 했는데, 인력이 부족해서인지 홍보도 하나도 안 되고 집회신고만 돼 있었던 거야. 아수나로 사람들 포함해서 열 명 정도 왔고 그냥 돌아가면서 발언하고 끝냈어. 아수나로에선 20055월 두발자유 집회 열기 이후에 청소년당사자 조직을 만들기 위해 논의가 있었나봐, 그래서 집회도 하고 학생인권공동행동이란 조직을 띄우자 논의도 했는데 실패로 돌아갔지. 그러고 2006년 초에 아수나로가 나아갈 길을 찾는 워크숍을 12일로 한다고 나한테도 오라고 그래서, 그때가 내가 서울로 이사 가기 얼마 전이었으니까, 가서 참여했는데 거기서 연구포럼이었던 이 조직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로 전환하자, 그리고 비청소년이 지원하고 청소년이 주도하는 그런 조직이 아니라 나이 상관없이 같이 활동을 하는 전국조직을 만들자고, 공식적으로 최초로 결정을 했지. 날짜를 일부러 그렇게 잡은 거 같은데 배경내 등 인권운동사랑방에서 제안한, ‘청소년인권운동 미래를 묻다워크숍이 바로 다음날에 있어서 난 거기도 이어서 갔어. 거기서 처음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제안이 됐지. 그 워크숍에서 청소년운동 역사나 현황을 처음 제대로 들었고 서울의 여러 활동가들도 처음 만났어. 20062월 달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가 이후 서울에서 활동할 기반이 만들어진 거지.

  

 고등학교 졸업하고도 청소년운동을 그만둘 생각은 없었어. 내가 청소년운동을 한 게, 그때까지로 치면 얼마 안 되잖아. 그래서 불만족스러운, 제대로 못 한 거 같은 느낌도 있었고. 한편으로 나는 빠른년생이니까 아직 청소년이야 그런 것도 있었고. 나이 먹어서 스무 살 됐다고, 당사자 아니라고 입 싹 닫는 건 좀 아니잖아. 이 운동이 얼마나 개판인지 광주에서 한 워크숍 등에서도 들었고 서울에서 한 워크숍에서도 들었는데. 사실 그땐 이렇게 청소년운동을 오래 할 줄은 몰랐고, 대학 다니면서 하자는 생각에 오륙년 하려나 생각했던 거 같아.

 

"두발자유 바로지금"

 

 20063월 달에,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네트워크)를 정식 결성하는 자리가 있었어. 네트워크 소속 단위로 아수나로, 나르샤, 인권운동사랑방이랑 발전하는 학생회 가자’ ‘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회도 들어오고 청소년다함께도 들어왔어. 네트워크 활동이 2006년 상반기엔 빡셌지. 아수나로는 새로 모임을 만드는 단계였으니 사업이 막 많진 않았고. 네트워크가 작년 514일 집회 1주년으로 두발자유 바로지금집회를 했어. 그 집회는 이백 왔나. 홍보 진짜 많이 했어. 한 달 반을 등하교길 홍보하고. 네트워크 활동을 실질적으로 한 사람은 6-7명 정도였는데. 네트워크는 연대체인데 연대체 아닌 것 처럼 실무실무하게 굴러간 게 있지. 그때 막 사람들이 공현이 보도자료 써했는데 난 보도자료를 한번도 안 써본거야. 난 검색하면 나오겠지 해서 보도자료가 무엇인가, 다른 단체 보도자료나 정부 보도자료 샘플 몇 개 검색해서 받아서 우리 보도자료는 이런 식으로 조합해서 쓰면 되겠지 하고 만들었어. 내가 만든 거 배경내가 수정하긴 했지만. 이렇게 말하면 좀 꼰대같지만 사실 일일이 안 가르쳐줘도 많은 걸 스스로 찾아서 할 수 있다니까.

 

 2006년에 네트워크가 한 중요한 활동이, 여름에 전국행진을 했거든. 서울에서 인천, 대전, 광주, 대구 이런 식으로 지역을 10여 명이서 봉고차 타고 돌면서 그 지역마다 있는 청소년단체나 전교조 만나서 간담회를 가졌어. 지역마다 하루씩, 단체 간담회 진행하고 길거리 캠페인도 하고 행진도 하고 그런 일정으로 6일 정도를 했어. 그러다 중간에 대구에서 학생 200대 체벌 사건이 벌어져서 대구에선 대구교육청 앞에서 일인시위도 하고. 그런 활동을 한 이유가, 전국에 흩어져있는 청소년인권에 관심 있을 만한 단체들을 만나서 청소년인권이란 게 어떤 건지 알리고 연을 만들고 모여보자 하는 의도였어. 현안으로는 학생인권법에 같이 힘 모으도록 설득하자는 취지도 있었고. 그 때 보통 단체들은 청소년운동이라는 게 있는 줄도 모르거나, 그런 활동하는 학생들이 있다더라 정도로 알지만 학생인권법이나 이런 운동 의제에 대해 잘 모르는 편이었어. 전교조 지부나 지역의 학생인권에 관심 가진 활동가를 만나면 우리한테 후원금도 주고 밥도 사주고 잘해줬지. 근데 조직으로서 잘 연이 맺어졌다기 보단 청소년운동에 우호적인 개개인 교사들이나 활동가들을 만난 게 성과로 남았어. 청소년단체들 중에 만난 곳은 우리세상, 반딧불이, 인천 내일, 이런 데였어. 그런 데 중에 계속 끈이 이어진 데가 반딧불이고. 울산, 광주, 인천에선 아수나로 지부들도 만났고 그게 아수나로 지부들에도 힘이 됐다고 생각해. 서로 힘을 주는 만남이었지.




 

2006-7년의 학내시위들

 

 네트워크는 역사연구팀, 활동하는팀 두 개를 꾸렸는데 사실 나는 둘 다 했지. 역사연구팀은 청소년운동 역사정리를 처음 해보자 해서 꾸린 팀이고, 활동하는 팀에서는 여러 가지 학교 대응도 했어. 학생들이 시위하거나 하는 걸 지원하기도 했고, 아니면 예컨대, 학생들이 체벌 당했는데 어떻게 해야 되냐고 연락이 왔는데 그 학생들이 직접 안에서 행동을 할 여건은 안 되지만 고발을 하고 싶다고 하면 가면 쓰고 체벌 피해 증언대회를 하고 그 내용 가지고 교육청 민원도 내고 우리가 학교 항의방문도 갔던 적이 있지. 네트워크가 2006년에 대응한 학교가 네 개 정도야. 2006년 하반기 쯤엔 두발자전거 스쿨어택도 했어. 두발자유니까 두발자전거라는 컨셉으로, 말하자면 학내시위에 지원을 가는 건데 학생들이 시위한다고 하면 활동가들이 자전거 타고 5-10명이 가서 자전거랑 같이 서서 학교에서 해산시키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사진 찍고 그런 역할을 했지. 두 번 정도 했어.

 

 그 때는 2005년 촛불의 영향도 남아있고 여러 학교들에서 학내시위 얘기를 하던 때였어. 514일 집회 직후에 양동중학교에서 두발자유 학내시위한다고 해서 네트워크에서 집회현장 가서 사진도 찍고 같이 시위도 했어. 별로 알려지지도 않은 일인데 나한테는 생생하게 기억나는 게 20063월에 경기도 광주에 경화여중이란 데서도 학내시위한다 그래서 내가 갔었거든. 그 때 난 서울 관악구에 살았으니까 새벽 4시 반에 나와서 경기도 광주까지 갔어. 시위하는 거 지켜보고 학교에서 해산시키려 하면 막으려고 했는데 결국 학생들이 걸려서 시위 장소로 예정된 운동장까지 나오지도 못했어. 교사가 건물 입구에서 못 나오게 막았거든. 씁쓸한 기억이지.


 2006년에 굵직했던 학교투쟁은 동성고 투쟁도 있었어, 오병헌이라는 아수나로 회원이 동성고 다녔는데, 체벌, 두발규제도 있었고 교사들이 <한겨레> 본다고 뺏고 그런 문제들이 있어서 투쟁 계획을 짰어. 걔가 등굣길에 일인시위 했지. 그 전에 강의석 사건도 있었고 학생이 나서서 문제제기 하는 게 당시엔 이슈가 돼서 취재가 많이 왔어. 동성고에서 오병헌을 일인시위했다고 징계하려 해서 시민사회대책회의도 크게 꾸렸어. 결국 학교에선 일인시위한 걸로 징계 내리진 못하고 두발단속 불응 정도만 징계를 내렸어. 교내봉사 정도로 나왔지. 그런데 그것도 단체들이 징계에 대해 교육청에 재심 넣고 그렇게 밀리다가 흐지부지 돼서 졸업하고 끝났어. 동성고 내 문제들이 해결이 됐냐 하면 썩 결과가 좋진 않았어. 오병헌이 제기했던 문제, 체벌에 대해 사과할 것, 두발자유 하고 보충 강제로 시키지 말라는 것 등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어. 괴롭힘 때문에 당사자가 힘들어하기도 했고, 이슈가 된 거에 비해 내부적 동력이 없었어. 내부 동력 없이 학내운동을 했을 때의 한계가 있지.


 2007년엔 울산에서 두 학교의 학내시위가 하루 동안 이루어졌어. 옥동중이랑 신정중, 두 학교 다 아수나로 회원들이 있어서 그 회원 중심으로 학생들이 모여서 했어. 학내시위 요구사항은 두발자유, 체벌금지, 등교 시간 문제 등 여러 가지 있었어. 둘 다 학교에서 교사가 주동자 학생을 패고 시위 해산시키고 그랬지. 울산지부에 중심적으로 활동한 참살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시위시간 맞춰 가서 기록도 하고 참여도 했어. 학내시위한 어떤 학생은 학교에서 맞고 부모 소환돼서 결국 활동 그만두기도 했고. 옥동중은 공청회 열어서 두발 규정은 완화시켰어. 그렇게 학생의 시위 강제해산시키고 때린 거 그 건으로 국가인권위에 집회 자유 침해로 진정 냈고, 인권위가 학내집회더라도 징계하고 해산 시킨 건 인권침해라고 결정을 해서 학생의 집회의 자유와 관련한 좋은 결정례가 남았지.


 그 땐 그래도 노무현 정부 때니까 청소년들 사이에서 우리가 말을 하면 뭔가 변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그나마 있었고, 또 학내시위 하는 다른 학교들도 있으니까 영향을 받아서 학내시위들이 좀 일어났었던 것 같아. 하지만 2007년 이후에는 아수나로에선 학내시위를 잘 권장을 안했던 것 같아. 학내시위 몇 번 해봤는데 성과가 별로 없으니까. 학내시위를 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준비를 해서 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어. 경화여중처럼 교사가 막으면 못 나오는 일은 없어야 하잖아. 종이비행기 시위도 사전에 걸려서 못 한 경우들이 있었어. 그리고 시위를 한다고 해서 학교가 바로 말을 듣는 건 아니니까 이후 계획이 있어야 하는 거지.

 

"청소년 대중이 직접행동을 해야 바꿀 수 있다"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로 전환하고 진주, 서울 지역은 기존 주체가 있으니까 처음부터 지부가 있었어. 진주는 포럼 때부터 활동했던 권오범이 진주 살았고 원래 그 지역에 행동하는 청소년이라는 모임이 있었으니까 그 기반으로 만들었지. 광주는 박고형준이라고, 전국중고등학생연합 광주지부장 출신인데 그 사람이 군대 가던 즈음 전국중고등학생연합이 없어졌고 제대하고 나서 그 사람 주축으로 아수나로 광주지부를 만들었어. 울산 지부는 자생적으로 새로 생겼고. 서울은 나, 오병헌, 조상신이 주로 초반 고정멤버였어.

 

 네트워크에서 학교 대응을 하고 활동을 하면 아수나로로 사람들이 유입이 되더라고. 아무래도 네트워크는 연대체고 새로 사람을 받는 단위는 아닌데 아수나로가 네이버 카페도 공개돼있고 하니까 그런 식으로 네트워크에게 영향을 받아서 아수나로 활력이 돌았어. 그 때 아수나로가 <청소년의 눈으로> 라는 신문 만들었고, 당시 아수나로 카페 회원이 천 명 정도였어. 아수나로가 초창기에 목표했던 건 대중조직화, 대중운동이였어. 구체적으로 대중조직을 어떻게 만들지 계획이 있었던 건 아닌데 어쨌든 청소년 대중이 직접행동을 해야 바꿀 수 있다는 게 기본생각이었어. 네트워크는 처음에는 나는 입장을 만들고 토론회를 하고 이론을 만드는 역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근데 실제론 네트워크도 굉장히 행동적으로 현장에서 활동했지.

 

 교육운동단체랑 문화연대에서 2003년부터 매년 한 안티수능페스티벌에 아수나로가 참여하기도 했어. 수능 철에 매년 했던 거지. 2006년 제목이 입시 즐페스티벌이었어. 교육부 앞에서 기자회견 하면서 단두대 만들어서 입시가 사형제다 살인이다 하며 퍼포먼스도 했고 대학로에서 문화제도 했어.




 

학생인권법 제정 운동

 

 2006년부터 학생인권법 서명운동을 계속 해왔었어. 학생인권법은 민주노동당 최순영 의원 발의한 법안이었는데, 그 법안이 사실 학생인권 요구를 제도화하려 한 첫 시도라고 봐도 무방해. 내용은 두발자유, 체벌금지, 차별금지, 학생회 법제화, 강제야자보충 금지, 종교자유, 이런 게 핵심내용이었고. 그거 통과시키려고 서명도 받고 캠페인도 하고 했지. 서명운동은 2007년 겨울쯤까지 했어. 우리가 받은 서명이 8천명인가. 온라인으론 안 받고 종이로만 받아서 그 정도였어.


 2007년 하반기에 학생인권법 투쟁을 대대적으로 했지. 전교조에서 주도해서 아이들 살리기 운동본부라는 걸 꾸렸는데, 네트워크에서 들어가서 연대체 이름부터 비판을 했지. 거기서 셧다운제 도입 찬성하기도 해서 그런 입장도 비판하고. 그 운동본부에서 학생인권법이랑 학교자치법을 의제로 서명운동도 하고 촛불문화제도 했어.


 그땐 학생인권법 통과가 될 것 같았거든. 국회도 열린우리당이 과반수 잡았고, 교육위는 열린우리당이랑 민노당이랑 합해서 반 정도 됐었고. 한나라당도 처음엔 기를 쓰고 막는 건 아니었어. 그런데 상임위 의결할 때쯤 교총에서 강력히 입장을 표명을 한거야, 학생인권법안이 전교조가 학교를 장악하는 법이라고. 특히 학교운영에 학생회 참여하게 보장하는 부분을 반대한 거야. 그래서 한나라당에서 강경 반대로 입장이 돌아서고 결국 내용이 학생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두루뭉술한 문장 하나 남고 날아간 채로 통과가 됐지. 그렇게 최순영 의원이 발의한 학생인권법안이 결국 실패에 가까운 결과로 남은 게 2008년 초였어.

 

휴대전화와 청소년인권

 

 돌이켜보면 2007년에는 두발자유 외에도 여러 가지 학생인권 이슈로 확장을 하고 입장을 정리하던 시기라고 생각하거든. 대표적인 게 휴대전화 규제 및 압수 문제지. 이전엔 휴대전화 규제 문제 같은 경우도 운동의제로 만들어지지 않았었어. 개별적으로 뺏기고 그런 일은 있어도, 학교 차원의 대대적인 규제 규정이 확산된 게 2007년 이후야. 그래서 휴대전화 규제 관련해서 우리가 어떤 입장을 가질 것인가, 내부 논리를 만들고 토론회 열고 하는 작업을 했었지.


 휴대전화 문제에 대해 입장을 만든 게 2007년에 했던 활동 중에 스스로 뿌듯하게 생각하는 활동이기도 해. 이전에도 두발자유의 경우 쌓인 글들이 많았거든. 내 취미가 학생인권 총정리 글 쓰는 거였는데, 체벌이나 두발이나 교복 같은 건 딴 거 딴사람들이 이야기를 해놓은 걸 총정리를 하는 느낌이었다면 휴대전화 관련해선 청소년인권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처음 만드는 느낌이었어. 네트워크에서 휴대전화 관련해서 교사, 학부모운동도 불러서 토론회를 했어. 그 때 우리가 제기했던 게, 휴대폰 압수가 사생활문제뿐 아니라 수업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거. 딴 짓을 허용하지 않는 교육방식의 문제라는 거. 우리가 이야기한 게 급진적이었던 게, 사실 휴대폰하는 게 뭐가 나쁘냐,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만 안 주면 됐지, 수업에 집중 안 할 자유도 있다 그런 이야길 했거든.





"미친 학교를 혁명하라"

 

 ‘미친학교를혁명하라집회를 2007년 상반기에 네트워크에서 주도해서 준비했어. 2006년 두발자유 집회의 다음 버전으로, 학생인권 의제를 추가해서 두발자유뿐 아니라 폭력 금지, 학교민주주의, 강제보충과 야자 금지, 소지품검사와 사생활침해 금지,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 입시살인과 입시신분제 반대, 이런 요구들을 했어.


 이 집회에서 처음 교육공동체 나다’(이하 나다’) 사람들을 만나고, 이후에는 나다 사무실을 회의공간으로 자주 쓰기도 하고 나다 사람들이 아수나로로 들어오기도 하고 교류가 많아졌어. 2008년에는 네트워크랑 나다가 공동기획 강좌를 열어서 언론 비평을 하기도 했었어. 신문 등이 어떻게 만들어지나 신문 읽기의 혁명책 같이 보기도 했고, 언론에서 청소년이나 소수자를 어떻게 그려내는가, 비판적으로 보기도 했고. 예를 들면, 강좌보다 이후이긴 한데, 배경내는 이른바 무서운 십대들에 대한 보도가 2008년부터 늘어났는데 그게 촛불집회를 통해 확인된 청소년 정치주체들에 대한 사회적 두려움이 반영된 거라고 얘기했었, 뭐 그런 관점의 논의를 주제로 강좌를 한 거지.

 

2007, 민주노동당 청소년위원회

 

 내가 민주노동당(민노당)에 당원 가입한 건 고등학교 때 같이 하교길 집회 홍보 나가주다가 대학 들어가더니 민노당 들어간 친구가 내 연락처 넘겨서 당원가입 권유를 받아서야. 그래서 걔 얼굴 봐서 들어가자 해서 2006년에 들어갔어. 원래는 당원 자격만 있었는데 전누리가 민노당 청소년위 들어와달라고 했어. 거기가 여러 단체 사람들 있고 그랬는데, 전누리가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편에서 거들 사람이 더 있으면 좋겠어서 들어오라 한 거지. 그래서 2007년에 내가 들어갔어.


 그 무렵에 청소년위원회 분위기가 약간 연석회의, 협의체 같았어. 각 단체 일정 공유하고, 같이 참여할 거 참여하고 품앗이 하고 공유하고 선거철 다가오면 청소년 정책 짜고 그랬지. 당시 구정인 위원장이 그런 면에서, 여러 정파와 단체 소속으로 이루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운영을 할지 고민을 많이 했다고 느껴졌어. 나는 운영위 회의 참석하고 같이 정책도 제안하고 그 정도 역할을 하다가 2008년에는 탈당을 했어. 정당 청소년위원회가 그런 식으로 운영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청소년을 정당에서 어떻게 조직할건지 계획이 있어야 하고 부문위의 목소리가 정당 전체에 반영이 돼야 하는데 그런 게 잘 안 됐어. 정책 만들어내는 건 할 수 있었지만 사실 정책을 만드는 건 정책실이 더 잘 하고 부문위는 요구를 하고 방향을 제시하면 되는 거지. 학생인권법도 최순영 의원이랑 몇몇은 의지가 있었지만 당 전체가 의지가 있었던 건 아니고.

 

2007, 입시폐지대학평준화국민운동본부

 

 ‘입시폐지대학평준화국민운동본부는 대선 앞두고, 아무리 민주당이 죽을 쑬게 뻔한 대선이었어도 입시 문제를 의제화 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꾸린 연대체였어. 2003년부터 안티수능페스티벌도 열고 입시 문제에 대해 활동이 있었지만 정책적으로 제기된 건 민노당이 서울대폐지론 얘기한 거 정도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거든. 입시폐지를 토론되는 정책의제로 올리자는 목표로 모였어.


 입시폐지대학평준화국민운동본부는 공식적으로 개인들의 연대체였는데, 가입비 내고 들어가는 구조였어. 그렇게 개인들을 끊임없이 대거 조직해서 목표 상으로는 가입비만으로 운영을 한다는 운영방식을 채택했던 거야. 경상대 정진상 교수가 입시폐지 전국 자전거행진도 했고. 수능 주에 문화제를 열어서 그 때 사오백 명 왔어. 개인들의 연대체였지만 집회 조직은 단체들이 조직적으로 했으니까 많이 왔던 거지. 당시에 입시폐지 주장하는 청소년동아리도 생기고 활기가 있었어.


 입시폐지대학평준화국민운동본부 운동은 2008년에 제일 활발했어. 지역별 토론회도 했고 집회도 규모가 컸지. 2009년 들어서면서는 활동이 크게 줄었어. 대선 이후에도 계속 활동해보자는 이야긴 있었지만 사실상 대선이 끝나면서 활력을 잃었던 거지.

 

2008년 촛불과 아수나로

 

 청소년들이 대거 거리로 나오니까, 아수나로도 촛불집회 현장에 참여하면서 광우병만 막으면 되냐, 청소년들의 문제는?’ 이런 얘기랑 청소년의 집회의 자유 같은 이야길 했지. 지금도 비슷하게 반복하는 이야기지만. 그때 자생적으로 생긴 청소년단체들이 있었는데, 전국청소년학생연합, 촛불소녀, 의식이깨어있는청소년연합 이런 단체들이 있었고, 희망에서 만든 10대연합이라는 곳도 있었어.

 

 당시에 517일에 휴교시위를 하자는 문자가 청소년들 사이에 돌았어. 학교를 가지 말고 집회를 하자는 거였지. 근데 517일에 청소년 집회가 준비되고 있는 게 하나도 없는거야. 나중에 밝혀진 건 그 문자는 그냥 어떤 재수생이 학교에 나가지 말고 정부에 항의하잔 뜻으로 자기 친구들에게 보낸 거래. 그래서 아수나로랑 문화연대랑 517일에 집회한다는 문자도 돌았으니까 집회를 해보자 해서 준비를 했고 준비하면서 청소년직접행동이란 임시 연대체를 만들어서 청소년 참정권 정치활동, 교육정책 이런 의제 얘기하는 집회를 열었어. 당시에 희망, 청소년다함께랑 갈등이 있었어. 우리가 517일 집회 같이 준비하자고 희망에 제안을 했는데 거절을 했었거든. 근데 나중에 희망이 똑같은 날에 별도 집회를 다른 장소에서 연다는 거야, 그걸 사나흘 전에 알았어. 그래서 우리가 먼저 제안했었는데 이게 뭐냐고, 우리가 준비하는 집회 쪽으로 합류하는 걸 고려해달라고 했는데 희망 쪽 집회는 10대연합이 준비하는 거라서 희망에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대. 근데 청소년다함께는 우리 집회 같이 준비하고 있었는데 희망 집회 쪽으로 합류하자는 의견을 냈던 거야. 여튼 그런 갈등도 있었어.

 

 2005년 촛불 때, 조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 2005년에 내신등급제 반대 57서울 집회에 천 명이 왔다고 하는데 점차 사람이 줄어서 21일엔 100명도 안 왔었다고 했었거든. 집회만으로는 안 되고 조직이 있어야 꾸준히 집회도 할 수 있다는 거, 파업이든 등교거부가 됐든 더 강한 행동도 할 수가 있고 요구를 공신력 있게 전달할 수 있다는 거. 그래서 2008년에 청소년이 대거 나왔다고 해도 회의감이 있었어. 아수나로로 조직할 생각에 설렌 건 있지만 이 촛불이 언제까지 갈지 알 수 없고 뭘 남길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있었지. 그래도 그때 전국청소년학생연합 만들어졌을 때는 기대가 있었던 거 같아. 그렇게 금방 없어질 줄 몰랐어.

 

 2008년 촛불 거치면서 아수나로 회원이 많이 늘었는데, 서울지부 회의 참석자가 많이 오면 20명 오고 그랬지. 사람이 늘어서 아수나로 내부 갈등도 생기고, 이전엔 새로운 사람이 소규모로 들어오니까 알음알음 뭔가 가르쳐주기도 하고 할 수 있었는데 한 번에 많이 들어오니까 감당이 안 된 게 있었거든. 아수나로가 너무 일만 하는, 실무 중심의 조직인데 좀 더 인간을 덜 소외시키는 조직이어야 한다는 비판도 있었고. 어쨌든 아수나로는 소수 활동가들이 집중하는 구조였는데 그 구조를 안 바꾸고 대거 조직을 하려 했으니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었지.




 

"기호 0번 청소년 후보"와 벌점제 반대

 

 2010년에 교육감 직선제 첫 동시선거가 치러지기 전, 2008년에 보궐선거처럼 서울 교육감 선거를 했어. 그때 서울에서는 이번이 첫 직선제 교육감 선거인데 청소년은 참여하지 못하는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기호 0번 청소년후보사업을 아수나로에서 했어. 재미있었어, 선거운동 하듯이 했지. 그때 소위 진보교육감 후보라고 해도 학생인권조례를 공약에 넣기는 해도 대표 공약으로 넣거나 내걸지는 않으려는 게 있어서 내부에서 사람들이 노력도 했고. 후보측 공식 입장은 아니었지만 학생인권은 표에 도움 안 된다는 얘기가 나와서 치를 떨기도 했어.

 

 2008년에 학생인권 이슈에서 의제 확장이 됐던 건, 그때 벌점제 도입이 될 때라 벌점제에 대한 문제의식도 확장이 됐어. 개별 학교에선 그 이전에도 벌점제가 있었지만 교육부가 마치 체벌의 대안인 것처럼 벌점제 도입 계획을 세워서, 아수나로 경남중부, 수원지부에서 비판하고 항의하는 활동을 했어. 체벌의 대안처럼 여겨지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우리 입장을 만들기도 했고. 벌점제가 학생들 퇴출시키고 징계시키는 역할을 하잖아, 비민주적이고 인권침해적인 학교 구조가 안 바뀌는데 체벌의 대안인 것처럼 벌점제가 실시되는 것은 잘못됐다고 이야길 했지. 경남 교육청이 벌점제, 그린마일리지 시범 운영으로 경남 모든 학교에 벌점제를 도입한다고 해서 아수나로에서 상벌점제 설문을 돌렸어. 실제 벌점제 시행하는 학교들 설문 돌면서 어떤 경험 있냐고 물어서 발표하고 교육청에 결과 전달했어. 수원도 상벌점제 설문 했고. 경기도 지역 학교들이 벌점으로 퇴학시키는 사례가 많았거든. 우리는 벌점제가 체벌 대안인 것처럼 벌점제가 합리적인 척 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까발리고자 했어.

 

2008년,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 보호주의와 여성 청소년 의제

 

 2008년에 네트워크는 네트워크의 역할을 재정립하는 시기를 거쳤어. 네트워크가 연대체로 만든 건데 단체처럼 빡세게 굴러간 것도 있고, 2008년 촛불 지나면서 아수나로 규모가 커졌고 아수나로가 자체 일정을 가지고 굴러가게 되니까 역량 배분이 아수나로쪽으로 기운 것도 있었고, 사랑방에서도 인권교육센터 들이 독립하면서 네트워크 참여했던 활동가들이 바빠진 것도 있었고. 아수나로는 2008년 촛불의 수혜를 받아서 커졌지만 네트워크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2006년에 시작했던 청소년운동 역사연구도 2008년에 마무리된 시점이었고, 학생인권법 운동도 일단락 된 시점에 의제를 넓히는 게 필요했어.

 

 네트워크가 원래 청소년운동의 내용을 채우는 역할을 하려고 했으니까, 2008년부턴 이제껏 내용을 별로 채우지 못했지만 중요한 의제들을 가지고 내용을 만들어보자는 계획을 가지고 여성청소년팀이랑 보호주의 팀을 만들었어. 공부하고 토론한 내용을 가지고 워크숍과 인권교육을 열어서 다른 활동가들이랑 나누기도 하고, 여성청소년팀에서는 인권오름에 <페미니즘인걸> 꼭지 연재도 했고. 보호주의팀은 2008년 촛불 때 보호주의 문제가 좀 불거졌거든. 가령 조갑제가 광화문을 청소년출입금지 구역으로 만들어 청소년들의 영혼을 보호해야한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집회 안에서도 그렇고. 이전에도 청소년보호법이라든지 청소년보호주의에 대한 활동가들의 문제의식은 있었는데 제대로 내용이 있었던 건 아니라서 필요성이 있어 만들었어.


 네트워크에서 2006년부터 인권교육을 꾸준히 해왔는데, 인권캠프 등을 청소년 대상으로 열어서 청소년인권 기초 교육을 했지. 2008년 이후에는 빨간물고기라는 이름으로 정기적으로 한 두 달에 한 번씩 주제를 가지고 교육을 하거나 네트워크에서 준비한 주제로 간담회를 했어.

 

일제고사 세이 노(Say-no)

 

 일제고사 반대투쟁을 2008년 하반기에 시작했어. 이명박 정부 들어서고 여름에 일제고사 실시한다는 발표와 함께 10월에 일제고사가 실시가 됐어. 아수나로에선 일종의 외곽조직처럼 무한경쟁교육,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청소년모임 세이 노’(세이 노)를 꾸려서 일제고사 반대 운동을 했어. ‘세이 노에는 2008년 촛불 때 집회 나왔던 청소년들이 들어오기도 했고. 그런데 운동 방식에서 학부모 단체나 전교조 쪽과 우리의 의견 차가 있었는데, 그쪽에서는 시험 날 체험학습을 가는 운동 방식을 택했거든. 하지만 우리는 체험학습도 부모 동의가 있어야 하는 거고 왜 시험을 거부하면서도 굳이 학습을 해야 하는지 문제의식이 있어서, 교육부 앞에서 잠좀자자 밥좀먹자퍼포먼스를, 정말로 앞에서 누워서 자고 도시락 먹는 걸 했어. 집회는 학부모단체랑 전교조 쪽이랑 같이 했지만.

 

 청소년운동에서 일제고사에 대해 가졌던 문제의식은 하나는 시험이 늘어난단 거 자체였어. 시험이 늘어나면 청소년의 삶도 피폐해지니까. 또 하나는 일제고사가 학교서열화 결과를 낳기 때문에 입시경쟁이 심해질 문제 때문이고, 어쨌든 학생들을 과다한 학습으로 몰아넣고 시험을 늘리는 걸 반대한단 의미지. 세 번째는, 이런 문제의식은 2009년에 돼서야 구체화된 문제의식이긴 하지만 청소년운동에선 일제고사 반대 운동을 통해서 시험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도 가졌어. 일제고사 문제에 대해 고등학생들이 시큰둥한 게 고등학교는 수능, 모의고사가 사실 다 일제고사거든, 전국 석차 나오고, 학교 서열화 되고. 그래서 이명박 정부의 일제고사 뿐 아니라 시험 자체, 지필평가를 통해 학생 개개인의 순위를 매기는 것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됐어. 또 누군가를 미달로 규정하는 것, 일제고사 치면 어느 학교에 미달인 학생이 많다 이런 게 나오잖아. 그런 방식의 점수내기로 누군가를 미달로 규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도 있었어.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국민운동본부랑, 일제고사 반대 운동을 한 게 청소년운동이 교육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과정이었다고 생각해.


청소년운동이 필요한 이유

 

나한테 강렬한 기억은 2005년 촛불집회인데, 그 촛불 때 두드러진 건 청소년운동과 교사운동· 학부모운동과의 대립각이었거든. 청소년운동이 기존 교육운동과의 사이에 어떤 분명한 선이 있음을 확인했던 거라고 생각해. 20055월 내신등급제 반대 촛불에 미조직된 청소년들이 대거 나왔어. 근데 전교조는 내신 강화를 옹호하는 입장이었거든, 수능도 내신 내용으로 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그 때 노무현이 3불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는데, 대학 본고사, 고교등급제, 기여입학제 안 된다는 게 3불 정책이었어. 대학이 임의로 입시 때 특정 고등학교 출신에 가산점 주면 안 된다. 내신의 범위 안에서만 대입이 이뤄져야 한다는 거였지. 사실 내신 강화가 교육운동의 오랜 요구였는데, 학부모운동에서는 사교육 억제로 사교육비 감소시키는게 주요 요구였으니까. 근데 학생들이 내신등급제 반대한다고 들고 일어난 거지. 전교조 쪽은, '우리가 주장한 거는 내신 강화지 상대평가식 등급제가 아니다'라는 입장을 내긴 했지만. 학생들 입장에서는 중간고사 기말고사 빡빡해지고 상대평가든 절대평가든 수행평가도 교사 눈치 봐야 하는 상황이 달가울 리가 없잖아.

 

 학생들이 집회 나오는 것에 대해서도 교육운동 내에서 입장이 갈렸어. 전교조에서 일부는 학생들이 집회 가는 거 지지하고 수업 빼고 갈 수 있도록 엄호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어떤 쪽에선 학생들의 순수한 뜻을 이해하지만 한나라당 쪽에 이용당한다고 우려했지. 당시에 한나라당이 대학 본고사 도입하자고 주장하고 내신 강화 반대했으니까. 조중동이랑 한나라당이 대놓고 내신 강화는 교육 질을 떨어뜨린다는 주장을 했었어. 참교육학부모회 간부는 자기 딸한테 쓰는 편지 형식으로, “그래도 어른들을 믿고 집회 나오지 말고 우리가 해결할 테니 믿고 기다려달라는 내용으로 글을 발표하기도 했어. 그때 내가 느낀 건 청소년들의 이해관계 문제는 청소년운동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거. 청소년들의 인권 문제, 교육 문제에서 다른 운동과의 이해관계가 달라지는 것을 실감했어. 독자적인 청소년운동이라는 게 꼭 필요한 부분인 거지.


(2부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