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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들

[16호] [관점들] 소녀는 인격체일 수 있을까: 영화 <아저씨>, <곡성>, <우리들>의 여자 어린이들

[16호] [관점들] 소녀는 인격체일 수 있을까: 영화 <아저씨>, <곡성>, <우리들>의 여자 어린이들


작성 : 쥬리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관점들'은 청소년 인권의 눈으로 영화, 책, 방송 등을 비평하는 리뷰코너입니다.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언제든지 활력소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2017년에 활기의 활동 계획을 논의하면서 소식지 <활력소>도 작게 개편했습니다. 먼저 '소식들' 코너와 '목소리들' 코너를 하나로 합치고, '사는 이야기' 코너를 신설했어요. '사는 이야기'는 청소년활동가로서 스스로를 정체화하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의 고민, 삶에 대한 이야기(에세이)를 기고받아 싣습니다. '사람들' 코너에서는 청소년운동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볼 수 있도록 개인 활동가의 인터뷰를 통해 청소년운동의 의미에 대해 살펴볼 예정입니다. 기존에 진행하던 단체 활동 소개 인터뷰도 함께 진행할 수 있도록 고민 중입니다. '관점들' 코너는 기존의 '덕질들' 코너가 전환된 것으로, 그 동안 다뤄온 것처럼 책, 영화, 방송, 미디어 등을 청소년인권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코너입니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조금 더 비평/칼럼의 성격으로 바뀐 점입니다. 그리고 이번 호부터는 활기의 재정 내역을 활력소에 싣지 않습니다. 청소년운동 전반의 소식을 담은 웹진이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재정 보고/결산은 활기의 후원인 분들께 별도로 발송됩니다!  

개편을 준비하면서 발행이 조금 늦어졌습니다만, 최대한 규칙적으로 발행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찾아올 새로워진 <활력소>가 청소년운동에 '활력소'가 되길 바라며,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 난다 (편집담당 / 청소년활동기상청 '활기')


 

 

 ‘벡델 테스트는 영화에 이름을 가진 여성이 둘 이상 등장하는지, 여성들끼리 이야기를 하는지, 남자에 대한 것 이외의 주제인 이야기가 있는지를 기준으로 영화의 성평등 정도를 측정한다. 나는 영화에 나오는 어린이·청소년 인물, 내지는 여성인 인물이 관객 입장에서 얼마나 이해 가능하고 이입할 여지가 있는 인물로 구축되었는지를 영화의 감수성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고 있다. 많은 경우 어린이 인물은 인격체의 재현으로서의 등장인물이라기보다는 비청소년 인물들 사이에 벌어지는 우여곡절의 요인 중 하나거나, 혹은 비청소년 인물의 인격 또는 심리상태를 나타내주거나 부각시켜주기 위한 장치로 활용된다.

 

 <아저씨>는 액션·스릴러물로 분류되는 영화로, 2010년 개봉 당시 가장 흥행한 한국 영화 중 하나였다. 조직폭력배 악당과 무능력한 경찰과 비청소년 남성 영웅(‘아저씨’)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구도를 그대로 따라가는, 네이버 네티즌 평점에 따르면 20대 남성의 선호도가 가장 높은 영화다.

 

 어린이·청소년, 혹은 여성으로 재현된 인물들은 비합리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하고, 그 인물이 그렇게 비합리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인물로 그려지는 것은 그/녀가 어리기 때문에혹은 여자이기 때문에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다음은 <아저씨> 의 한 장면이다. 훗날 비청소년 남성 주인공에 의해 구원의 대상이 될 여자 어린이인 소미의 어머니가, 소미를 찾으러 주인공 태식의 집에 찾아온다. 소미의 어머니는 우리 애 불러들이지 마라고 말하며, 소미에게 이상한 짓을 할 경우 불알을 뜯어버리겠다고 매서운 눈빛과 단호한 목소리로 주인공을 협박한다. 그런데 태식이 대답을 않자 그리고 바로 다음 그녀가 하는 말은 이것이다. “정 그렇게 외로우면 데이트 신청을 하든가.”

 

 딸을 찾아 헤매던 상황에서 딸을 추행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 남자를 협박하다가 바로 다음 순간 그 남자를 유혹하는 이 인물은, 관객으로서 이해나 예측이 가능한 인물이 아니고 인격체의 재현이라고 할 수도 없다(그녀가 딸을 성적 경쟁 대상으로 여기고 있으며 딸을 견제하기 위해 위와 같은 언행을 했다는 식의 해석도 가능할 것이나, 인물의 맥락이 전달되기에 그녀는 자격 미달인 엄마로서만 지나치게 타자화되어 있다). 그녀가 이해 불가능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무런 설명 없이도 자연스러운 서사의 일부로 여겨질 수 있는 건, 그녀가 나이트클럽 댄서이며 마약사용자이고 남편이 없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나이트클럽 댄서인 마약사용자 비혼모는 우리처럼 이성과 판단력이 있는 존재라고 상상하지 않을 관객의 인식에 기대어, 이 장면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소미는 스스로도 각막 적출을 당할 위기에 처하고 엄마는 살해된 것을 알게 된 직후인데도, 자신을 구하러 온 태식, ‘아저씨에게 감동에 찬 눈길로 나 구하러 온 거 맞죠?” 라며 시기적절한 대사를 던지고 그가 사준 선물에 미소를 짓는다. 소미라는 인물에게 부여된 역할은 위기에 처한 소녀로서 아저씨라는 유사 아버지적 주인공에 의해 구원되는 대상, 그리고 주인공의 행위에 감동하고 고마워하여 주인공의 영웅적 면모를 부각시키는 역할 이외의 것이 아니다.



 

 여성이거나 어린 인물들이 모두 사회적 기준에서의 합리성을 갖춘 존재로 재현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에게 이 세계의 법칙은 불리하게 작용하고, 소수자들은 자신에게 유리하지 않은, ‘비합리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도 높은 것이 현실이다. 중요한 것은 인격체를 재현하고자 한다면 어떠한 체현된 경험을 가진 인물이 그 상황에서 왜 그런 선택을 하는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2014년 영화 <도희야>의 인물 도희(공교롭게도 <아저씨>소미역을 맡은 동일한 배우가 연기했다) 여자 중학생인데, 자신의 구원자로 설정된 비청소년 인물 영남이 자신을 만졌다는 진술을 경찰에게 하고는 영남이 추행죄로 잡혀가게 되자 그녀가 처벌받지 않게 하기 위해 애를 쓴다. 분명히 그러한 진술이 영남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 예상 가능한 상황이었음에도 도희가 그런 진술을 한 이유를, 영화는 한 가지밖에 제시하지 않는다. 어려서, 미성숙해서, 중학생이라서. 영화의 서사를 이끌어가기 위해 어린 인물이 비합리적 행동을 하도록 만들고 그 행동의 이유를 미성숙함으로 환원시킬 뿐이라면, 영화로서는 아쉽고 사회에는 해롭다.

 

 <아저씨>의 경우 (유사)아버지가 어린 소녀를 구원하는 전형적인 이야기였다면, 2016년 개봉한 스릴러·호러 영화인 <곡성>은 딸을 구해내고자 했지만 실패한 아버지를 그려낸다. <아저씨>의 태식과 달리 <곡성>종구는 영웅이 되지 못하는데, 영웅이기에는 무능력하고 초자연적인 현상 앞에서 속수무책이며 결국 딸도 가족도 구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편 종구의 딸인 효진<아저씨>의 소미처럼 마냥 연약하고 불쌍한 어린이로 등장하지 않는다. 딸에게 아내와 섹스하는 장면을 들킨 후 난처해하는 아버지를, 효진은 걱정 말어. 암말 안할랑께. 첨 본것두 아니여. 괜찮애.”라고 위로한다. 마냥 연약한 소녀는 아니지만, 야근하는 아버지에게 옷을 가져다주며 밥도 안 먹고, 잘한다 잘혀.”라고 잔소리하는 효진은 종구에게는 사랑스러운 딸이다. 그래서 귀신이 들린후 효진의 대비되는 모습에 종구는 충격을 받는다.

 

 ‘일본 사람을 만났냐는 종구의 질문에 효진은 싸늘한 눈빛으로 내가 왜 말해야 되는데. 왜 자꾸 캐묻고 지랄이여.”라고 답하고 급기야는 소리를 지른다. 잠자는 효진의 방을 몰래 뒤지던 종구는 다 뜯긴 교과서와 씨발’, ‘죽어등의 말이 적히고 유방과 성기가 강조된 나체와 페니스가 그려진 공책을 발견한다. 종구는 잠자는 딸의 몸에 반점이 생겼는지를 확인하는데, 어느새 눈을 뜬 효진은 종구에게 오밤중에 딸내미 치마 걷어 올리고 뭣하냐고. 말을 하라고 개새끼야.”라며 따진다. “쳐다보지 말라며 종구에게 소리를 지르는 효진을 엄마와 할머니는 아빠한테 씨발놈이 뭐야라며 질책하며 말리고, 무당에게 다녀온 뒤 가족들은 효진이 귀신에 들렸다고 결론을 내린다.

  


 표면적으로는 효진이 귀신이 들려서아버지에게 반항하고 성()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하지만 종구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반항하고 나체와 성기를 공책에 그린 것이 딸이 아니라 그녀의 몸을 침탈한 외부의 존재라고 믿고 싶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을 때 대답을 거부하는 것, 공책에 나체와 성기를 그리는 것, 자는 도중 자신의 치마를 걷어 올린 아버지에게 무엇을 하는 건지 따지고 쳐다보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은 어쩌면 비정상적인 행동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한 주체가 여자 어린이기 때문에 그 행동은 귀신에 들린 결과로 쉽게 이해되었고, 효진과 그녀의 가족 간의 갈등은 효진이 어머니와 할머니를 살해하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귀신이 등장하는 호러 영화 중에서도 어린이 귀신이 나오는 영화가 제일 무섭다고들 한다. 어린이가 어린이같지 않을 때 그/녀는 공포의 대상, 아주 낯선 존재로 타자화된다. 그런 점에서 <곡성>의 결말에서 아버지에 의한 소녀의 구원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고무적이다. 그러나 날것의 여자 어린이의 재현은 가족과 사회 속에 수용되지 못한 채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것으로 남았다.




 

 한편 2016년 개봉한 <우리들>에 등장하는 여자 어린이()에게는 비청소년 구원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들의 삶은, 우리 인격체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비극이라기엔 사소한 절망으로 채워진, 구원의 순간 없이도 줄곧 이어지는 온전히 자신만의 것인 인생으로 그려진다. ‘에게는 자신을 구원해줄 아버지나 다른 비청소년이 없다. 그녀의 아버지는 술 먹고 비틀거려 때로는 오히려 자신이 챙겨주어야 할 대상이고,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은 선의 삶에서 일부일 뿐이다. <우리들>은 크게 흥행하지 못했지만 신선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그 영화가 달랐던 건 평범한 어린이를 인격체로 재현했다는 것이었고, <우리들>이 받은 찬사는 어린이를 인격체로 재현한 서사물이 그토록 부재해왔다는 현실을 방증했다.

 

 나는 <우리들> 같은 영화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그리고 여성이 인간의 범주에 들지 못한 채 인간들의 서사를 위한 도구로 활용되는 영화는 그만 보고 싶다. 사람 모습으로 등장한다고 해서 모두 인격체의 재현인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