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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들

[12호]『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당신들의 대한민국』,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다른 늑대도 있다』(나름아지트 책꽂이)

[12호] [덕질(?)들]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당신들의 대한민국』,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다른 늑대도 있다』(나름아지트 책꽂이)




다른 청소년활동가들과 같이 보고 싶고 같이 나누고 싶은 나의 덕질(?)들을 받는 리뷰코너입니다. 

앞으로 리뷰가 적당한 게 안 들어오면, 나름아지트에 소장된 책들을 소개하는 글들을 싣기로 했어요. 이 글들은 활기 페이스북페이지 http://facebook.com/hwalgy 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소개하고 싶고 나누고 싶은 덕질 이야기가 있으면 자유롭게 「활력소」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로빈 월쇼.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번역. 일다.)


요즘 여성혐오, 데이트폭력, 성폭력 등의 이슈들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트렌드에 맞추어 나름아지트에 따끈따끈한 신간이 들어왔어요. 바로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입니다.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성폭력'을 주제로 다양한 사례와 조사 자료들을 통해 소개하고 분석한 책입니다.


이 책이 나온 배경은 1980년대 미국 사회입니다. '강간'은 보통 모르는 사람에 의해 예기치 않게 일어난다는 통념과 다르게 지인에 의해, 때로는 데이트 상대나 애인에 의해서 어떻게 강간이 일어나고 피해자와 가해자는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어떻게 느끼는지 등에 대해서 조사했습니다. 더 심층적으로 성폭력을 사람들이 어떻게 '학습'하고 '정당화'하는지, 성폭력 이후에 피해자들이 어떤 경험을 하는지, 경찰과 법원과 대학 등이 사건에 어떻게 잘못 대처하는지 등을 분석하고 있기도 하고, 대안에 대해서도 제안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 미국 사회라고는 하지만 지금 보아도 충분히 의미 있는 논의들입니다.


책 중에 10대 청소년들의 경험을 다룬 부분도 있습니다. 거기에서 보면 청소년 피해자들이 왜 문제를 공론화하거나 부모에게 말하지 못하는지 등을 이야기합니다. '부모에게 내가 섹스를 하고 술을 마셨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아서' 강간 이야기도 할 수 없었다는 걸 보면 청소년에 대한 억압이 여성에 대한 억압이나 성폭력과 함께 어떻게 얽혀 있는지 볼 수 있지요.


실용적으로나 운동적으로나 꼭 한번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당신들의 대한민국> (박노자 지음. 한겨레출판.)




나름대로 2000년대 초중반, 한국 사회에서 제법 널리 읽혔던 책 중 하나인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박노자가 한겨레에 칼럼을 연재를 시작하고나서 뜨거운 반응을 얻어서 2001년에 내게 된 책으로 알려져 있죠. 박노자나 홍세화 등의 필자들이 쓴 칼럼집, 에세이집 등은 2000년대 초중반 많은 10대, 20대였던 이들의 정신세계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그 시절 청소년활동가들 중 상당수에게는 애독서이기도 했지요. 나름아지트에서 어쩌면 오래된 책으로 손에 꼽을 만한 책 중 하나입니다. 2권이 나오고 나서 원래 있던 <당신들의 대한민국>에도 1자가 붙어 다시 재판을 찍었는데, <나름아지트>에 있는 것은 그렇게 다시 나오기 전의 버젼입니다. 표지에 있는 빵모자를 쓴 박노자의 사진이 참... ㅎㅎ


박노자는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귀화한 사람이고, 한국사/한국학 등을 전공한 사람이며, 음... 사회주의자라고 분류할 수 있을 법한 인물이지요. 그래서 <당신들의 대한민국>에 담긴 박노자의 여러 통찰들은, 외부에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낯설게 보게' 해주었고, 어떤 면에서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미개' 담론의 선구주자이자 원조격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그런 관점이 박노자가 단지 외국인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박노자는 보편적인 인권과 평화에 대해, 역사와 사회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인류와 한국에 대한 애정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박노자는 한국에 대해 연구하고 공부한 사람으로서, 결코 한국이 '미개'하고 뒤떨어졌다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지요. 한국이 근대-현대의 역사 속에서 왜 이렇게 폭력적이고 군사주의적이고 봉건적인 문화를 갖게 되었는지 추적하고 분석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요. 한국의 '미개함'이란 사실 한국의 근대성 자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뭐, 책 제목에는 '전근대와 국가주의를 넘어서'라고 써있지만.)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폭력성, 민족주의/국가주의와 인종주의 등의 문제를 직면하게 된 한 사람으로서, 나온 지 15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읽을 만한 생명력이 있는 이 책에 경의를 표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15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이 책에서 지적한 문제들이 여전한 우리 사회에 대한 슬픔을 품습니다.

"보편적인 의미의 인간의 존엄성은 열렬한 민족주의자에게는 이해가 잘 안 되는 이야기다. '보편적인 도덕'도 그렇다. '우리'와 관계 있는 것은 본래 다 도덕적이다. '남'의 도덕성 여부에는 관심이 없다. 다만 '남'이 '우리'의 적대자가 되면, '남'이 '악마'가 되고 '우리'가 천사가 되는 흑백논리가 당장 적용된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소설집. 이성과 힘.)


80년대에 고등학생운동을 한 분들을 만나서 얘기를 듣다보면 그 무렵에 함께 읽은 책 중에 꼭 한번씩 이름이 언급되는 책이 바로 난쏘공입니다.


난쏘공을 단일한 소설로 기억하는 일이 많은데 책 표지에도 써있다시피 소설집의 형태에요. 단편소설들의 묶음이랄까요? 처음에는 연작소설들로 한편한편 발표되었던 것들을 엮어서 하나의 책으로 나온 겁니다. 그 소설들이 모두 같은 세계 속에서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이어진 사건들, 각자의 입장에서의 사건들을 다루거든요. 그래서 전체를 읽고나면 마치 긴 하나의 소설을 읽은 듯한 느낌이 드는 거지요.


이런 연작소설의 구성도 그렇고 각 작품 안에서의 서술기법도 모자이크식으로 시간과 장소를 오가면서 인물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가는 방식이에요. 읽다보면 소설적으로 굉장히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환상적 상징적 소재나 장면도 많이 나오고요. 철거민과 노동자의 현실을 다룬다는 것 말고도 구성이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신선한 소설로도 가치가 높습니다.


읽다 보면 이게 분명 1970년대의 이야기인데 집이 철거당하는 이야기도 그렇고 공장 이야기도 그렇고 참 현재적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읽으면서는 청소년 등장인물의 입장에 왠지 더 감정이입하기도 했습니다. 몇년전에 읽었는데 아직도 그 대사가 기억나네요.


"우린 모두 난장이에요"


지금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 더욱 더 생각나는 책인 것 같습니다.










<다른 늑대도 있다- 10대를 위한 판타지 걸작선> (어슐러 k.르귄 외 지음. 정소연 옮김. 창비.)


< 다른 늑대도 있다>는 미국에서 출간된 단편선집을 그대로 번역해온 책입니다. 패트릭 닐슨 헤이든이라는 SF 편집자가 고른 단편들입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고른 기준에 미국 현지의 냄새가 느껴집니다. 미국에서 이미 상당한 팬층을 확보한 시리즈물(앨빈 메이커)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단편이나, 유명한 어슐러르귄의 어스시시리즈의 한편 등도 수록이 되어 있어요.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사전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봐도 크게 재미가 없을 듯합니다.


단편 중 '엄마 갔어' 등은 서사적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라기보단 하나의 장면, 정서를 강렬하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입니다. 장르문학은 이야기나 캐릭터에만 집중한다는 편견을 거스르는 작품들이지요. '조의 머리카락'도 과연 이것이 판타지인가 장르의 경계선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하지만, 여하간 강렬한 단편입니다. 작은아씨들의 스핀오프 작품이라고 할까요. 작은아씨들의 등장인물인 조의 이후 삶과 조가 잘라서 판 머리카락에 대해서 대비시키면서 쫓아가는데, 페미니즘과 리얼리즘의 문제의식이 녹아 있습니다. 정작 표제작인 '다른 늑대도 있다'는 묘사와 서술의 긴박감은 있으나 판타지로서나 소설로서나 썩 좋다고 추천할 수는 없겠네요.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은 것은 '리자와 크레이지워터맨'과 '집 앞에서 기다리는 엄마 아빠'입니다. 특히 '집 앞에서 기다리는 엄마 아빠'(첨부한 이미지)는, 이계모험물이라는 장르의 뒷면을 그림으로써 장르문학을 풍부하게 하는 단편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습니다. '밤마다 자식들이 사라진다. 그런데 어딘가 다른 세계로 갔다오는 것 같다. 부모의 고민과 선택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보호와 주체성, 믿음과 안전과 소통 등에 대한 여러 생각이 들게 하기도 하지요.


"저희에게 '모르는 편이 더 안전해'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