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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들

[8호] 『섹스북』, 『망고가 있던 자리』(나름아지트 책꽂이)

[8호] [덕질(?)들] 『섹스북』, 『망고가 있던 자리』(나름아지트 책꽂이)




다른 청소년활동가들과 같이 보고 싶고 같이 나누고 싶은 나의 덕질(?)들을 받는 리뷰코너입니다. 

앞으로 리뷰가 적당한 게 안 들어오면, 나름아지트에 소장된 책들을 소개하는 글들을 싣기로 했어요. 이 글들은 활기 페이스북페이지 http://facebook.com/hwalgy 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소개하고 싶고 나누고 싶은 덕질 이야기가 있으면 자유롭게 「활력소」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섹스북』


종종 '청소년활동가들을 위한 성교육' 같은 강좌를 활기에서 열어야 하는 것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을 하고는 합니다. 뭐, 당장은 못하니까 미래의 바람으로 남겨두고요.

일단 이 책을 읽어보시면 성교육을 대충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바로 『섹스북』(귄터 아멘트 지음, 이용숙 옮김, 박영률 출판사)입니다.


독일에서 1970년대에 나온 뒤로 아직까지도 가장 훌륭한 청소년용 성교육 책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 책이라고 합니다. 은근히 유명한 책이에요.

이 책은 성에 대해서 그럴듯하게 포장하거나, 미사여구로 꾸미거나, 숨기지 않습니다. 그냥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듯이, 조금은 수다스럽게 이야기를 할 뿐이지요. 수다스럽다는 말은 아마 읽어보시면 이해할 텐데요. 이 책은 흔히 여러 항목으로 나뉘어 있는 다른 성교육 책과는 달리 목차가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쭈욱 읽을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의학적인 지식에서부터, 사회적인 문제들, 성차별의 문제나 성경험 등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 범위는 전방위적입니다. 성소수자 등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요. 성에 대해 보수적이거나 금기시하는 사람들, '고리타분한' 사람들을 통쾌하게 비판하고 놀리기도 합니다.


한 12년 전에 읽었던 활동가 말로는 무슨 계단에 사람들이 다니는 묘한 표지를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이 표지가 독일판 원래 표지일 거예요. 아마 청소년(같아 보이는 사람) 둘이 저렇게 딱 붙어서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표지를 쓰기가 부담스러웠던 것 아닐까 싶네요. 한동안 품절 상태이더니 다행히도 표지를 복구해서 요새 새로 나오고 있더군요. 


아, 하나 옥에 티라면... 처음 한국에 나온 게 15년쯤 전이다보니 번역에서 좀 '옛날 용어' 같은 게 쓰인 게 있었어요. "동성연애" 같은? 그리고 반복해서 지적되는 이야기지만, 한국에 수입되면서 성기 사진 등을 넣은 게 죄다 짤려나간 거는 가슴 아픈 일입니다. 여러 모로 한국의 성(性)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모습입니다.

아래는 『섹스북』의 일부, '미성숙'이라는 이야기를 다룬 구절입니다. 꼭 한번 읽어보고 싶어지지 않나요?



이건 분명 언짢고 신경 거슬리는 일입니다. '그런 일을 하기에는, 또는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아직 어리다'는 얘기를 안듣고 지나가는 날이 없으니 말이죠. 어른들은 여러분에게 날마다 그런 말을 하지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 여러분이 의문을 제기하면 해당되는 법조문까지 증거로 제시하면서, '여기 이렇게 적혀 있기 때문에 어른인 우리는 이 일을 해도 되지만 청소년인 너는 아직 해서는 안된다'고 설명합니다. 어른들은 그걸 '청소년 보호'라고 부르며 그런 법조문은 '미성년자 보호법'이라고 부릅니다. 부모와 청소년기의 자녀들은 서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자주 입씨름을 벌입니다. 이때 부모님 쪽에서는 자신들의 권리를 '부모로서 자녀를 돌보고 보살필 권리'라고 설명하고, 자녀 쪽에서는 '부모의 폭력'이라고 비난합니다. 이들이 폭력이라고 말할 때는 물리적, 정신적 폭력을 통틀어 글자 그대로 '폭력'을 의미하지요. 비상시엔 부모님이 정말 물리적 폭력을 가하기도 하니까요.
어른들은 물론 청소년들을 성적인 면에서도 통제하고자 합니다. 성적인 것을 청소년에게 허용한다면 어떤 것을 어느 정도 허용할 수 있을 것인가가 또 문제죠. 그러나 어떤 일을 '금지'하는 것은 어른들이 청소년들을 복종하도록 통제할 수 있을 때, 또 말을 안 들으면 처벌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지요. 이 점에서 오늘날 도덕 교육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방법을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중략)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지극히 일반적인 규범을 따르고자 합니다. 모든 종류의 천박하고 부도덕하고 도가 지나친 정열에 대해서는,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거나 아니면 직접 맞서 싸우는 방식으로 애초부터 그 싹을 잘라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1858년에 당시의 영향력 있는 어떤 교육자가 작성한 글입니다.어떤 정열의 싹을 질식시켜야 한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더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겠지요.
"사춘기에 발생하는 양성간의 성행위는 자위행위와 유사한 동기를 갖는다. 외형적으로는 그 행위가 헤테로섹스의 기본적인 인식에 근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 사람이 함께 자위행위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기계적인 성욕해소방법에 불과한 것이다."
이것은 1979년에 역시 이름 있는 교육자가 발표한 내용입니다. 바이어른 카톨릭 주교회에서 발표된 이 글을 쉬운 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춘기의 소녀와 소년이 성행위를 하는 것은 자위행위를 할 때와 비슷한 이유에서다. 겉으로는 두 사람이 진정으로 서로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마스터베이션을 하고 싶은 자동적인 욕구를 둘이 함께 푸는 것일 뿐이다." 청소년들의 애정에 대한 욕구를 완전히 무시하는 발언이지요.  (중략)
여러분이 어른이 되었을 때 어떤 유형에 속하게 될지는 여러분이 '철없는' 첫사랑의 경험에 편을 드느냐, 그런 따위를 거부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정의롭지 않은 일에 대한 분노, 거짓말과 사기에 대한 혐오도 역시 '미성숙'에 속하는 표현입니다. 세상에서 '성숙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필요에 따라서는 부정행위에 동조하고 거짓에 눈을 감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서 성숙한 인간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은 흔히 생명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미성숙한 사람들만이 정말 살아있는 것처럼 살 수 있습니다. 이 '미성숙' 쪽으로 자신의 삶을 결정한 사람들은 나이가 든 뒤에도 이제까지의 인습을 뒤흔드는 항상 새롭고 놀라운 경험을 쌓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망고가 있던 자리』


나름아지트 장서 중에는 소설도 굉장히 많습니다. SF단편선 류들도 많죠. 이번에 소개할 것은 SF는 아니지만, SF처럼 신비로운 느낌이 드는 소설, 『망고가 있던 자리』(웬디 매스 지음, 정소연 옮김, 궁리 출판사)입니다.


『망고가 있던 자리』는 공감각을 소재로 해서 쓴 소설이에요. 글자나 단어를 색으로 인식하고 소리에서 도형과 색깔을 느끼는 공감각을 가지고 있는 미아가 주인공입니다. 미아는 모두 자기처럼 보고 느끼는 줄 알고 있다가 초등학교 때 당황스러운 경험을 하게 되지요. 그 뒤로 자신의 공감각을 숨기고, 자기가 어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결국 의사 등을 찾아다니다가 '공감각'이 뭔지 알게 되고 자신의 다른 공감각을 가진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공감각을 긍정하게 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새롭게 공감각인들과 사귀다보니 원래 있던 친구들과 사이가 소원해지고 갈등을 겪기도 하고, 다른 공감각을 가진 사람을 도와주기도 합니다. 앞서서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고 한 것은 공감각을 묘사하는 부분이나, 침을 맞은 뒤에 새롭게 지각하게 된 세상의 모습 등이 그렇다는 건데요. 뭐 그렇다고 초자연적이거나 초능력이라고 할 것은 아닙니다.


제목인 "망고가 있던 자리"는 미아가 함께 사는 고양이 이름이 "망고"인 데에서 온 거에요. 원제는 A Mango shaped space. 직역하면 "망고 모양을 한 공간/자리"라는 의미지요. 망고가 사라지고 난 뒤, 망고가 항상 있던 이불에 망고 모양의 빈 자리가 남아 있는 걸 묘사한 표현으로 작중에 등장합니다. "망고가 있던 자리"라는 표현은 좀 덜 시적이지만 괜찮은 번역인 것 같습니다. 이 고양이 망고에 얽힌 이야기는 소설의 후반부에 중요한 사건이 됩니다.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감명 깊거나 놀랍거나 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세세한 표현이나 묘사가 좋고, 또 여러 가지 공감이 가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소수자들이 학교에서 겪는 문제들이 연상되기도 하고, 상실의 과정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과정, 자기 긍정의 과정 등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공감각인이라는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이면서도 꼭 공감각인이 아니어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낸 게 대단하다고 평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미아 윈첼은 공감각인이고 그게 소설의 주요 소재이지만, 10대 초반의 평범한 청소년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귀여움과 재미가 생기죠.



원사운드님이 만화로 그린 버젼이 있습니다. 소설보다 인물이나 사건이나 장면이 좀 더 생략되어 있는데, 공감각의 느낌을 좀 더 시각적으로 잘 느낄 수 있어요.

http://oooz.net/comics/a_mango-shaped_space_1st/
http://oooz.net/comics/a-mango-shaped-space_2nd/


마지막으로 책 전체 내용과는 별 상관은 없지만 책에 나오는 구절 하나를 소개해보겠습니다.


"일요일에 숙제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 - 미아 윈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