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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28호][사람들] "저는 언제나 청소년인권운동 주변에 있을 거예요" - 윤가현님 인터뷰

이번 [사람들] 코너에서는 '과거의 청소년인권운동가들을 만나다'라는 주제로, 2008년에 일제고사 반대운동을 함께 했던 윤가현님을 만나보았습니다. '가현이들'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감독이시고, 지금도 새로운 영화를 준비하고 계시다는 가현님의 인터뷰, 바로 만나볼까요?

- 인터뷰 진행 및 정리 : 공현, 피아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직장갑질 119에서 활동하고 있고, 독립영화 감독입니다. 꽥쉰내라고 불러주는 이들은 이제 12년 전에 함께 했던 친구들만 있어서 그렇게 소개하기는 민망하네요. 윤가현이라고 합니다.

 

 

과거에 하셨던 청소년인권활동은 무엇인가요?

 

2008년에 광우병 촛불집회에서 아수나로 친구들을 만나 청소년인권활동을 시작했어요. 2008년 여름에기호 0번 청소년 처음으로 시작했던 활동이었어요. 전청련(전국청소년학생연합)에서 활동했던 친구가 같이 가자 해서 갔다가 알게 됐는데, 우리가 직접 교육감을 뽑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나아가서 청소년인 우리가 직접 교육감 후보가 되겠다라고 주장하는 활동이었어요. 그리고.. 일제고사 거부 운동을 주로 열심히 했었어요. (아수나로에서 주로 활동하셨던건가요?) 소속되어있던 단체가 따로 있지는 않았어요. 처음에 주변 지인의 권유로 참여했고, 자연스럽게 뭐 할 때마다 옆에서 같이 했었거든요. 꼭 어디에 속하지 않아서, 그냥 청소년운동을 같이 하는 사람이었어요. 굳이 소속을 따지면 2008년에는 일제고사반대 청소년모임 '세이노(Say-No)'에서 활동을 했었네요.

 

 

일제고사 거부운동을 했던 활동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것저것 떠오르는게 많아요. 하지만 그 중에서도 교육청 앞에서 농성했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엄청 추운 겨울에 스티로폼 깔고 팜플렛 접으면서 난로 앞에서 손을 겨우 녹이고, 어디서 왔는지 모를 잠바들을 껴입고 농성했었는데.. 그 와중에 그 교육청에서 일하시는 경비 아저씨가 와서 물 뿌려서 싸우고. 그냥 그런 식으로 추웠던 기억들이 가장 많이 떠올라요. 그 운동을 준비했을 때도 기억에 많이 남는데, 그 때 다녔던 학교에서 회의하는 충정로까지 1시간 정도가 걸렸거든요. 저녁 5-6시에 학교가 끝나면 지하철 1시간 타고 가서 회의하고 다시 1시간 걸려서 집에 오는 생활을 했었어요. 요즘은 그 때는 참 무슨 에너지로 그렇게 열심히 활동을 했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해요. 일제고사 반대 서명 받았을 때도 생각나고, 거부한 당일도 생각 많이 나고... 그때 정부청사 앞 바닥에 그림도 그리고, 낮잠자는 퍼포먼스도 했었어요. 근데 누군가는 그 퍼포먼스에서 정말 자버렸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청소년인권운동을 하시다가 이후에 어떤 삶의 경로를 밟아오셨나요?

 

대학을 안 갔는데, 안 가고 난 이후에 뭘 해야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많이 위축되더라고요. 방황을 좀 했었어요. 가족 안에서도 대학을 가지 않은 것으로 마찰이 생겨서 집도 나오고요. 또 스스로가 이 (청소년)운동을 계속 할 수 있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에도 확신이 없었거든요. 당장의 생계를 유지해야하는 것이 급급하고 해서, 활동을 그만두고 스물 두 살쯤 까지 계속 이런저런 알바하고, 방황하면서 살았어요. 그러다 영화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전문대에 가기로 결정을 했어요. 근데 부모가 전문대에 가는 것을 엄청 반대를 해서, 직접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어서 살아야했어요. 그때 방학에 알바를 2개씩 했는데, 아침 7시부터 카페 알바를 하다가, 3시에 마치고 돌아가서 또 6시부터 밤 12시까지 호프집에서 알바를 하고. 이런 식으로 생활했어요. 더는 이렇게 못 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루하루를 아주 열악하게 살았는데, 예전에 청소년운동을 같이 했던 친구가 알바연대(*알바노조)에서 하는 인터뷰를 저한테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알바연대의 요구가 최저임금 1만 원이었는데, 그 이야기에 너무 혹하더라고요. 그때는 최저임금이 워낙 작다보니 천원 쓰는 것도 무서웠어서, '이 운동이 너무 잘됐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알바노조 일을 하게 되었는데, 노조에서 일을 하다 보니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들었어요. 활동도 너무 중요하지만, 최저임금을 벌면서 사는 사람들의 삶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노조 상근활동을 그만두고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었어요. ‘가현이들이라는 영화고, 2017년에 상영을 마무리했어요. 요새는 불꽃페미액션이라는 페미니즘 단체에서 활동하시는 분들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영화를 찍고 있어요. 올해 안에 마무리를 하고 내년에 상영을 하는 것이 목표예요.

 

사진 제공 : 윤가현님

 

 

 

영화를 만드는 일을 하실 때, 청소년인권운동의 경험이 영향을 주나요?

 

어떤 영화를 찍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제 일상의 많은 것들에 영향을 줬어요. 예를 들어서 뭐, 나이에 관해서 갇히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한다, 이런 사소한 마인드에서부터, 누구를 만나도 함부로 반말을 하지 않는다던지 같은 태도까지도요. 이런건 사실 어떤 노동운동이나 다른 운동에서 활동을 했을 때보다 청소년운동에서 받는 영향이 크다고 생각해요. 영향은... 전반적인 삶의 마인드?(웃음)

 

 

청소년활동가들을 대상으로 다큐는 찍을 생각은 없나요?

 

..습니다.. 있어요... .. 마음 속에.. 언제나.. 있습니다..

 

 

인터뷰를 정리하며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제가 운동을 했던 당시가 어떤 과도기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어요. 지금이라고 그때와 크게 다를 거라고 생각하는건 아니긴 하지만.. 청소년운동을 스펙으로 대학을 갔었던 사람도 있었고, 청소년이 아닌데 청소년운동을 계속 하는 것이 고민인 사람들도 있었고, 그런 와중에 떠나는 사람들을 붙잡을 수도 없는 고민도 있고.. 물론 저도 비청소년이 되고 떠난 사람 중 하나이니 부채감이 있어요. 청소년운동을 생각하면 그런 여러 가지 생각이 복잡하게 들어요.

 

저는 언제나 청소년운동에 연대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이런 사람이 꼭 저만 있는건 아니고, 우리가 떠나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사실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주변에 있는 이들이 후원도 잘 해주고 하면 좋겠지만... 저는 주변에 있다기 보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길 바라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