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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17호] [사람들] "그 땐 이렇게 오래할 줄 몰랐는데..." 청소년운동에 10여년째 몸 담그고 있는 공현과의 인터뷰 (2)

[16호] [사람들] "그 땐 이렇게 오래할 줄 몰랐는데..." 청소년운동에 10여년째 몸 담그고 있는 공현과의 인터뷰 (2)


17호부터 '사람들' 코너에 두 개의 인터뷰가 올라갑니다. 하나는 작년부터 꾸준히 진행해온 활기 지원사업 단체 후속 인터뷰로, 청소년 단체와의 만남을 통해 그 단체의 활동을 소개하는 기사이고요, 다른 하나는 청소년운동을 했던, 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청소년운동의 의미와 역사를 그려보는 인터뷰입니다. 구술된 과거에 대한 해석은 인터뷰이의 주관이 개입되었을 수 있습니다. 사실관계에 대한 이의제기는 활력소로 연락주세요! 




  공현과의 인터뷰는 매우 긴 시간이-거의 여섯 시간 정도가-걸렸다. 2005년부터 시작된 공현의 청소년운동은 현재진행형이고, 이 글에 담을 수 있었던 내용은(2005-2008년을 담은 1부에 이어) 2009년부터 2012년까지 공현이 했던 활동 중 일부일 뿐일 것이다. 이 글에 싣지 못한 공현의 2013년 이후 활동은 다른 지면을 통해 전달할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공현을 인터뷰한 본인은, 2011년부터 청소년운동에 발을 들인 사람으로서 지금은 공현과 같은 단체에서 함께 일을 하고 있다. 일에 대한 것이든 사적인 이야기든 대화를 안 나누고 사는 사이가 아님에도 인터뷰를 하면서 처음 듣는 이야기가 많았다. 공현은 종종 2005년부터 쌓인 자신의 청소년운동 역사를 공유할 사람이 없다고 푸념을 하는데, 또 그러한 상황이 자신이 쌓아온 역사의 무게이려니 생각한다고도 이야길 한다. 나는 공현이 청소년운동을 해온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되었으면 좋겠다. 당연한 듯 주어진 억압을 깨기 위해 별종처럼 취급받는 우리 청소년활동가들의 목소리와헌신이 역사로 남길 바라기 때문이다. 


- 인터뷰어 쥬리의 말




 

 1부를 2008년의 일제고사 반대 투쟁 얘기로 끝맺었는데, 2009년에도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아수나로)에서 제일 주력해서 한 건 일제고사 반대 투쟁이었어. 이명박 정부의 학교자율화 조치나 자사고 늘리고 하는 식의 교육정책 전반에 문제의식이 있긴 했지만, 일제고사는 시험이 일괄적으로 치러지고 해직교사도 생기고 그러니까 피부에 와 닿는 정책이었거든


일제고사 오답선언서울시교육청 앞에서의 농성


 아수나로에서 만들었는데 아수나로 외의 사람들도 많이 참여했던 무한경쟁교육,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청소년모임 세이 노’(세이 노)에서 2009년 초에 교육청 앞에서 농성을 했어. 원래 전교조에서 해직교사 복직 요구하면서 노숙농성을 하고 있었는데 그 옆에 자리 깔고 농성했지. 그리고 일제고사를 반대하는 학생들의 선언, ‘오답선언을 받았는데 학생들이 일제고사에서 일부러 오답을 찍어서 일제고사의 공신력을 떨어뜨리자는 전략이었어. 그래서 그 오답선언 받으러 등하굣길 캠페인도 다녔고, 8천 명 정도 모았어. 캠페인 하러 학교 앞에 찾아가면 시험 반대한다니까 좋아하고 일제고사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다, 선생님들이 뭐라 한다면서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많았어. 고등학교는 원체 시험을 많이 치니까 좀 시큰둥했고, 중학교랑 초등학교에서 우리 캠페인에 반응이 좋았지.

 

 근데 예상치 못한 일이 있었는데, 원래 정해졌던 당시 일제고사 날짜가 3월 첫째 주였는데 연기가 된 거야. 연기가 된 이유는 몇몇 학교랑 교육청에서 자기 학교나 지역 점수 높이려고 문제 유출 시키고 조작을 한 게 드러나서 발칵 뒤집혔었거든. 그래서 우리는 원래 일제고사 일자까지 3주 정도 농성하려 했던 건데 기간이 늘어난 거지. 그 때 농성하다 추운 날씨에 몸 버린 사람들이 많아. 당시 농성 생각하면 생각나는 건, 근처 편의점에서 컵라면 사서 물 받아서 농성장으로 돌아오면 딱 알맞게 익거든. 컵라면이랑 음료 사서 나눠 먹고 기타치고 노래 부르고 했던 게 기억 나. 근데 옆에서 농성하던 전교조 사람들이 우리한테 농성을 좀 엄숙하게 해야지 널브러져 있다고 뭐라 하기도 했어.





 청소년운동이 전교조나 학부모단체들과 함께 일제고사 반대 투쟁을 했지만, 일제고사 반대 투쟁에 나선 동기랄까 감정적인 온도 면에서 차이가 있었던 것 같아. 교사단체나 학부모단체에서는 초등학생까지 일제고사를 봐야 하냐면서 초등학생에 대한 동정심을 강조하는 게 있었고, 좋은 시험이 있고 나쁜 시험이 있는데 일제고사는 나쁜 시험이다, 라는 정도. 청소년운동에서는 시험 제도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고, 2009년 하반기엔 평가를 평가한다라는 토론회에 참여해서 청소년의 입장을 이야기하기도 했어. 일제고사 투쟁이 아수나로가 평가(시험)시스템을 어떻게 볼 것인가 논의하고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어. 교육과정에서 평가라는 게 꼭 정해진 시간 동안 정해진 문제를 풀어내는 지필 시험의 형태여야 하는 것은 아니고, 더더욱 그 결과로 학생의 점수를 내고 서열화할 필요는 없다는 것, 이미 학교 시험은 교육과정을 피교육자가 잘 받아들였는지 평가하는 목적이 아니고, 현재의 시험 방식이 아니라 질적인 피드백과 소통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교육의 평가과정을 전환해야한다는 논의를 했었어.

 

 일제고사 관련해서 마지막으로 아수나로 서울지부가 크게 했던 건 20107월 정도가 마지막이었어. 광주지부나 창원지부에서는 지역에서 하는 일제고사 반대 연대체에 결합했어. 우리가 피로했던 것도 있지만, 2010년 선거에서 진보교육감들이 당선되고 나서는 자기 지역들에서는 정부가 실시하는 거니까 안 할 순 없는데 불참할 사람들은 체험학습 신청하거나 하는 식으로 선택권 보장하겠단 입장을 교육청들이 내서 진보교육감 당선됐던 서울지역에서는 2009년처럼 그 투쟁이 크게 일어나지 않았거든. 그 뒤에 2012년에 초등 일제고사는 폐지됐고.

 

청소년인권캠프와 전국 학생인권실태조사

 

 2009년 여름엔 아수나로에서 청소년인권캠프를 했던 거 같은데. 우리가 농담처럼 2-30명 캠프 오면 한 명 정도는 활동가가 되더라, 라고 이야기하곤 했어. 캠프 한 번 하는데 많이 들면 600만원 들거든. ‘600 들여서 한 명 남기네 하하이런 얘기 하고 그랬지. 캠프 열 때는 참가자들이 숙박을 해야 하니까 노조나 다른 어른들이 믿을 만한 단체를 공동주최로 해서 부모들한테 설득을 했어. 캠프가 청소년 조직화에 괜찮은 방법인 것 같긴 한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문제지.

 

 아수나로에서 전국 학생인권실태조사도 했었어. 그 이전엔 청소년단체에서 학생인권 영역 전반에 걸쳐 그렇게 대대적으로 조사를 한 적은 없었거든. 국가인권위나 교육부에서 한 건 있었지만. 실태조사 방식은 온라인으로도 받고 교사들 협조 받아서 학교에서 응답 받아서 수거해 입력하기도 했는데, 그 때는 처음 하는 거니까 다중응답이 그렇게 코딩하기 힘든 건지 몰라서 나중에 분석 때 고생을 했지. 그 실태조사를 했던 이유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고 학생인권이 체감상 더 후퇴한 느낌인데 실제로 그러한가를 수치로 검증해보자는 의도가 있었어. 결과 나온 것도 2007년이나 2008년에 비해 현재(2009) 더 나빠졌다는 응답이 다수였고, 학생인권조례 찬성한다는 응답이 압도적이었어.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만들기

 

2009년 하반기에는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안을 만드는 과정도 있었어. 당시 서김상곤 교육감 공약사항이 학생인권조례였는데, 우리가 운동을 하고 요구를 해왔기 때문에 반영이 됐던 거라고 생각해. 후보 시절에 우리가 의견을 내서 공약에 반영이 됐던 거지. 그렇게 김상곤 교육감이 공약은 해놨는데 내용을 자체적으로 만들 수는 없으니까 성공회대 교수에게 연구용역을 주고 조례안 내용을 만들게끔 하고, 연구팀에서 만든 조례를 검토할 자문위원회를 꾸렸어. 연구용역팀에는 박경석 교수와 하승수 변호사가 주 담당 연구자를 했고, 다른 활동가들도 들어갔고, 나는 연구보조원으로 들어갔어. 왜 보조원으로 들어갔냐면, 학력상 보조원밖에 될 수가 없었거든. 그 연구팀에서 일본 가와사키 아동 인권 조례랑, 2006년에 광주에서 학생인권조례 만드려고 했을 때 있었던 안이랑 UN 아동권리협약 토대로 검토하고 학생들 설문조사 한 내용도 보고 그렇게 조례안 초안을 완성했어. 그게 이후에 경기도나 다른 지역 학생인권조례의 원형이 됐지.





 그 연구용역팀이 만든 조례안이 먼저 자문위원회로 넘어가고, 자문위원회의 검토 단계에서는 연구용역팀에서 만든 안 거의 그대로 교육청에 넘기긴 했는데, 내부에서 논쟁이 많았던 건 집회 및 사상의 자유 부분이었어. 자문위원회 내부에 교총 사람도 있었으니까. 결국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집회 및 사상의 자유 부분이 후퇴하고 두발자유 부분도 애매한 문구(마치 길이만 자유인 것처럼 해석될 여지가 있는)로 제정된 부분이 아쉽지. 조례안을 가지고 공청회를 두 번, 평일엔 시민 공청회로 하고 주말엔 학생 공청회로 해서 두 번 진행했는데, 학생 공청회가 활발하게 잘 됐어. 당시에 곽노현이 그 학생 공청회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며 교육 영역으로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졌다고 하던데. 곽노현한테도 학생인권조례가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던 거지. 그렇게 2010년에 경기도에서 학생인권조례가 발의는 됐는데 반대가 심해서 보류가 됐었어. 그래서 교육청에서 꾸렸던 학생참여기획단이랑 아수나로가 통과를 촉구하는 서명운동도 진행했고, 결국 회기를 바꿔서야 통과가 됐었지. 당시 민주당도 소극적이었지만 김상곤이 미는 거니까 밀어줬어.

 

아수나로가 동아일보 1, 조선일보 2면에 난 해

 

 2010년은 아수나로가 동아일보 1, 조선일보 2년에 난 해야. 2010년이 전국 동시 교육감 선거가 1기로 치러진 해라, 아수나로에서 2008년에 서울지부에서 했던 기호 0번 청소년후보캠페인을 전국에서 하기도 했어. 서울에서 곽노현이 당선되고, 아수나로를 비롯해서 시민단체들이 취임식에 초청을 받았거든. 그 때 우리가 가서 피켓팅을 하자 해서 일제고사 X 학생인권 O’ 이런 피켓을 들고 가서 서있었어. 언론들이 취임식 취재 왔다가 우리도 찍어갔었는데, 동아일보에서 1면에 교원평가 반대하고 일제고사 반대하는 중고등학생 단체가 있다면서 보도를 한 거야. 그 때 아수나로 카페에 회의록 내용 중에 전교조가 일제고사 반대 투쟁에 소극적이니 우리가 독려하자는 말이 있었는데 그것도 인용해서 기사 내고. 그 땐 우리가 회의록 보안에 신경을 안 썼었지. 동아일보에서 부모 몰래 활동하는 진보교육감 응원 부대이런 식으로 크게 보도를 하니까 조선일보에서도 기사를 냈는데 아수나로는 태반이 20, 탈학교 청소년이라고 낸 거야. 집회신고할 때 대표자 명의를 비청소년 활동가로 한 적이 있었는데 마치 그 사람이 대표인 것처럼도 보도되고. 동아랑 조선일보가 내니까 다른 작은 언론들에서도 홍위병이니 뭐니 하면서 보도했고. 우리도 프레시안에 반박 기사 내고 시사인 인터뷰도 했어


 하여튼 그렇게 보도되면서 인지도가 올라갔고, 그 해 여름 총회가 오십 명이 와서 공간이 미어터졌어. 양면적인 효과가 있었는데 일단 청소년 인권에 원래 관심 있었는데 아수나로 존재를 몰랐던 사람들은 그걸 보고 단체에 들어온 거고, 한편으로는 그냥 유명해지니까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지. 그래도 일단 인지도를 높이는 게 대중조직화에는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 끔찍한 주민발의서울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

 

 2010년 하반기엔 경기도는 조례 정착화를 위한 활동을 했고, 서울은 '그 끔찍한 주민발의'를 시작한 때였어.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통과가 확실시될 쯤 서울에서도 곽노현도 당선됐으니 학생인권조례 만들자 해서 시민사회단체들 쫙 모아서 운동본부를 꾸렸어, 거기까진 좋았지. 우리 문제의식은, 경기도 같은 경우 교육청이 주도한 게 되니까 내용 면에서 아쉬운 것도 있고, 조례가 안착화되려면 시민들에게 많이 알려지면서 제정되어야 한다라는 판단이 있었거든. 그래서 서울시 교육청에서 따로 발의를 하더라도 시민사회에서 운동으로 주민발의를 하자고 했어. 전교조에서도 전교조 서울지역 조합원이 1만 명 가까이 되니 조합원 한 명당 열 장씩만 받아도 주민발의 성사 가능하다고 자신감이 있었고. 모인 사람들은 의지가 있었는데 각 조직들이 잘 움직이지 못했는지, 20111월에 받은 주민발의 서명을 점검했는데 5천 장밖에 안 모인 거야. 주민발의는 시작하고 6개월 안에 서울시민 유권자 1퍼센트 인구만큼 모았어야 했거든. 게다가 청소년은 유권자가 아니란 이유로 서명이 법적으로 유효하게 계산되지도 않았고, '학생인권'조례인데도 말이야.





 그래서 주민발의를 포기할 거냐 하는 의견도 나왔었는데, 동아일보에서 학생인권조례 시민단체들이 3개월 동안 5천명밖에 못 모았다고 보도를 한 거야, 대체 어떻게 안 건지. 그래서 비상상황이 됐어. 이렇게 되면 서울시민 1퍼센트도 찬성 안 하는 조례라는 인식이 만들어져서 교육청이 발의해도 힘을 못 받아서 통과가 안 될 거고, 제정되더라도 조례가 무력화될 거라는 위기의식이 있었어. 그래서 결의를 해서 2월부터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거리캠페인을 시작했어


 거리서명 받느라 청소년활동가들이 많이 붙었고 고생을 했어. 그때 나는 수원에서 살았거든, 수원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면서 아침 9시까지 출근해서 1시간 점검회의 하고, 하루 종일 캠페인 하고, 저녁에 어디 단체 행사 있으면 쫓아가서 가판 깔고 서명받고 그런 스케줄로 뛰었어. 거리서명만 2만여 명 모았어. 전교조 서울지부에서 1만 정도까진 모았고. 민주노총이 좀 많이 해줬는데 지하철노조 강호원이라는 활동가가 적극적이어서 매주말 선전전 혼자서 나가고 대상포진 걸렸는데도 나가시고 그랬어. 민주택시에서도 승객한테 서명받아 보내주고. 그런 식으로 노조 조직도 움직여줬고 어린이책시민연대 같은 학부모.시민단체들도 힘을 합쳤고. 그렇게 했는데 오천 장 정도 부족했어. 실패하나 싶었는데 한겨레 신문에 배경내가 학생인권 칼럼 쓰고 간지로 서명지를 광고지처럼 끼워서 돌려서 그거로도 많이 들어왔고. 막판에 열심히 서명받아서 결국 1퍼센트를 넘겨서 서명운동을 완료했지.

 

 그 시절에 내가 아수나로에서 패악을 많이 부렸어. ‘주민발의 실패하면 죽을 거예요그런 말 하고 다녔고. 악에 받쳤어. 같이 하는 단체들에도 속상하고 서운한 게 많이 생기기도 했고. 막상 발의되고 시의회로 넘어가서 통과가 되니 마니 할 때는 오히려 비교적 덤덤했어. 운동이라는 게 원래, 개고생해서 해도 안 되는 것도 있는 거니까.

 

대학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

 

 그렇게 주민발의 운동을 끝내고, ‘대학거부로삶을바꾸는 투명가방끈’(투명가방끈) 활동이 시작됐어. 원래 따이루, 공기 등 93년생, 열아홉 살이었던 청소년활동가들이 꽤 있는데 입시거부할 사람들이 있어서 같이 입시거부 선언도 하고 모임도 꾸리자고 해서 꾸린 게 투명가방끈이야. 열아홉 살 뿐 아니라 이미 이십 대인데 대학을 거부한 사람들도 같이 하자고 얘기가 돼서, 나도 대학 자퇴할 참이라 함께했지. 대학교 제대로 안 나간 건 2010년 하반기부터, 조례 주민발의 운동하느라 안 갔어. 수업은 재밌었지만 운동이 더 급했지. 대학 더 다닐 생각도 없고, 휴학도 계속 해서 더 이상 휴학 할 수도 없게 됐고, 또 서울대 졸업이라는 학벌을 갖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컸어. 원래는 조용히 자퇴할 생각이었는데, 투명가방끈이 너무 관심을 못 받는거야. 그래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공현이 대자보를 붙여라해서 내가 자퇴선언하는 대자보를 붙였고, 그 때 하루만에 언론 열두 군데인가와 인터뷰를 했어. 소위 명문대를 자퇴한다니까 관심을 보였던 거니까 착잡하기도 했지.





 감옥엔 20124월에 들어갔어. 원래 2월쯤 들어갈 거라 예상했는데 재판부 사정 때문에 밀렸어. 그래서 옷도 다 대구 본가에 보냈는데 2개월이 붕 떴지. 남은 2개월 동안은 서울 학생인권조례 통과되는 거 보고, 대중조직 관련 글이라던지 원래 쓰려고 했던 글들이나 정리해야 할 일들 했어. 병역거부는 청소년운동 시작하기 전, 고등학생 때부터 알았는데, 그땐 아 군대를 안 갈 수도 있구나, 나도 군대 가고 싶지 않은데 병역거부 할까 하는 생각을 했었어. 왜 병역거부를 했냐고 물으면, 병역거부가 더 나한테 어울리고 나다운 결정이니까. 그걸 소견서에 언어화한 건, 국가가 개인에게 남을 살상하라고 명령하는 걸 따를 수 없고 군사력으로 평화를 지킨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써서 냈었지.

 

아마 난 앞으로도 청소년운동을 안 하긴 어려울 거야

 

 청소년운동 전반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전체적인 길을 그리려 하고 청소년운동이 무엇이고 우리가 뭘 하려 하는지를 정리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몇 없는 게 외로울 때가 있어. 내가 지금 그리는 그림은 우물모임이 청소년운동에서 활동가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공유되는 담론을 정리하는 역할을 하고 활기 등을 통해 확산시키고 대중조직이 양적인 조직을 맡는 것. 대중조직이 조직화를 해서 수백, 수천 명 정도 조직을 가지고 아수나로는 거기에 내부 정파 내지는 일정 교집합의 쫀쫀하게 입장 성향을 공유하는 활동가 조직 역할을 하고. 청소년운동을 했던 주체들이 성장해서 나이 먹어서 청소년운동을 떠나더라도 다른 운동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생각해. 그러려면 지금처럼 소규모론 안 되고 수십 명 수백 명이 활동가로 배출이 되는 규모가 되야 전체 운동사회에 영향력이 생긴다고 보는데. 청소년운동의 경험을 가지고 이념이나 훈련이 돼있는 사람들이 청소년운동에 대한 인지도도 높이는 역할도 하고. 그게 가장 이상적 형태라 생각해. 정당 청소년위원회는 지금 실행하기에는 여건이 안 되고, 대중조직이 있어야 그 위에서 정당 청소년 조직이 생길 수 있다고 봐.

 

 아마 난 앞으로도 청소년운동을 안 하긴 어려울 거야. 어떤 식으로든 관여하고 있을 것 같아. 설령 다른 일을 한다면 다른 운동을 한다기보다는 일반적인 임노동을 할 수 있다곤 생각해. 청소년운동 말고 다른 운동을 할 거 같진 않은데, 운동은 청소년운동 하나만으로 할 게 많고 생각할 것도 많은데다, 난 청소년운동에 대부분의 삶을 걸었는걸.

 

 청소년운동에 대부분의 삶을 건 사람으로서는, 사람들이 청소년인권 관련 무슨 일만 있으면 나만 찾는 거, 그런 건 좀 싫다 생각하는데, 그게 내가 쌓아온 역사가 무겁게 느껴질 때지. 다른 사람이랑 공유하기 어려운 쌓인 역사와 경험의 문제니까. 그런 의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느낄 땐 있어. 하지만 청소년운동이 나라고 느껴져서. 청소년운동을 빼면 뭐가 남나, 남는 게 없겠지. 남아야 하나 그런데. 만약 어떤 사정이 있어서 운동을 못 하게 된다면, 예를 들면 단체에서 징계를 받아 못 활동하게 된다 해도, 나름대로 글을 쓰거나 그런 작업을 할 거고, 그런 작업을 해서 긴 시간 후에 발표될 수도 있고 전해질 수도 있을 거고. 청소년운동을 대외적으로 못 해도 청소년활동가로서 운동에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나 자신에게 나는 청소년활동가로서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거고 그게 특별히 어떤 형태여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

 

 나는 삶이라는 건 원래 의미가 없는 건데, 재밌게 살면 되는 거지 하는 생각이 있어. 청소년운동이 재밌냐고? 학생인권조례 주민발의 운동도 힘들었지만 재밌었지. 마라톤하는 느낌이랄까. 인생 자체는 유희적인 거지 본질적으로 주어진 목표가 있거나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거나 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 최소한의 사회적 인정, 주변과의 관계가 불필요한 건 아닌데 집착하고 싶지 않고. 이런 인생관은 고등학교 2학년 쯤, 나름대로 책 읽고 삶이란 어떤 것일까 왜 사는 것일까 소설 읽고 해서 얻은 답이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