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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활동가의 사는 이야기

[17호][사는 이야기] 생각 없이 활동하기

[17호] [사는 이야기] 생각 없이 활동하기


- 글 : 치이즈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서울지부 활동회원)


'청소년활동가의 사는 이야기' 코너는 청소년활동가로서 스스로를 정체화하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의 고민, 삶에 대한 이야기(에세이)를 기고 받아 싣습니다. 

활동가로 살며 겪는 고민들, 청소년활동가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 등이 있다면 활력소의 문을 두드려 주세요!  


 

청소년인권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닌 나와 관련된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쓴 게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나의 고민, 나의 느낌, 현재 나의 문제의식. 그러한 것들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시작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 아수나로를 들어와서 청탁받은 원고를 쓸 때, 나는 그 전에 열심히 아수나로 카페를 뒤져 읽었던 지난 논평과 발제문들의 언어를 그대로 옮겨다 썼다. 이대로 해도 괜찮을까 싶었지만 나는 아직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고, 시간이 지나면 좀 더 나의 언어로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수나로'의 생각이 아니라 '활동가 치이즈'로서의 생각을 담아 쓰기 위해서는, 좀 더 활동을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로 이런 저런 팀과 회의에 참여했고, 디자인도, 결산도, 코딩도 전혀 할 줄 몰랐던 내가 이리저리 민폐를 끼쳐가며 활동을 했다. 정신없이 온라인회의를 하고, 기획안을 쓰고, 워크숍을 참여하고 나면 내 분야에 조예가 깊은, 멋진 활동가가 될 줄 알았다.

나이도 적고 경력도 없었던 내가 뭔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 같고, 성취감을 누릴 수 있을 수 있었던 때는 유일하게 활동을 할 때였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마치 양으로 승부를 보겠다고 결심한 사람처럼 가시적인 결과가 드러나는 활동에만 집중했다. 신문을 만들고, 후원행사를 준비하고, 거리 캠페인을 꾸려 나가고, 수첩을 제작하고, 청소년활동가마당과 팀 워크숍과 수많은 토론회와 공부모임을 기획했다. 나만의 시간이라고는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처럼 거의 매일 늦은 밤까지 나름아지트에서 살다시피 했고, 자투리 시간에도 회원들에게 모임 연락을 돌리거나 요즘것들 배송을 했다. 그러다 글을 써야 할 때가 오면, 그 주제에 대해서 오래 붙잡고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이것, 저것 검색하다 얻어걸린 비유 하나를 잡고, 청소년운동에서 하는 주장을 섞어 쓱쓱 글을 써 내렸다. 글의 내용보다는 또 다른 원고 마감을 하나 지켰다는 것, 이 글이 신문 지면에 기사가 되었든, 토론회 자료집의 발제문이 되었든 또 다른 활동의 결과물이 된다는 것에 은근히 더 만족했던 것 같다. 아니면 그렇게 글을 써서 받은 돈이라던가. 그래서 내 글이 전달하는 주제는 항상 명확하고, 단순했다. 참신한 비유와 사례를 얹었을 뿐, 핵심적인 내용은 결국 청소년운동이 해왔던 아주 기본적인 주장들을 전달하는 데 그쳤다. 청소년운동 밖의 사람들이 보기에만 '뽀대나는' 글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나는 지쳐버렸다. 그리고 지쳤다는 이유로, 자투리 시간에 틈틈이 하던 잔일을 그만두고 그 시간을 아이돌 덕질을 하는 것으로 대체해버렸다. 나만의 시간을 누리겠다고 하면서, 공식적으로 있는 회의나 행사에 참여할 때를 제외하고는 온종일 핸드폰을 붙잡고 아이돌 영상과 팬픽을 찾아봤다. 그러다보니 활동 초기에 읽으면서 내 안의 문제의식을 불러일으켰던 한겨레21이나 슬로우뉴스, 인권오름 등의 기사들과 멀어졌고, 책은 더욱 손도 대지 않았다. 사실 이전에도 그런 기사들을 보면 그 순간 분노하고 끓어올랐을 뿐, 그러한 사안에 대해 곱씹고 내 것으로 소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쏟아지는 사안들과 활동 의제들을 꾸역꾸역 삼키기만 하다가 그로기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 대응했던 나의 반응은, 꼭 해야 하는 회의와 행사에만 참여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인권 활동과 관련된 모든 것을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것이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집에 오면 인권활동가 퇴근'이라는 공식이 머릿속에 박힌 것처럼, 침대에 드러누워 핸드폰을 켜면 일부러 더 정치적인 논쟁들을 피하고 일부러 더 자극적인 것을 찾아 생각 없이 소비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고, 어쨌든 나는 활동을 계속 하고 있으므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점점 더 머릿속이 비워지는 것 같았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글을 쓰라고 하면 '그건 내 역량으로 할 수 없어'라는 말부터 떠올랐다. 오랜 시간 활동만 계속 하다 보면 이런 저런 주제들에 대해 내 의견을 가지고 생각하는 힘이 생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지금의 나는 무언가를 생각하고, 글을 쓰려는 시도조차 두려워졌다. 활동가로서 의견을 가지고 글을 쓰지 못하는 나는 그저 한 시민단체의 실무를 맡고 있는 직원인가? 어쨌든 활동을 시작했을 때의 내가 원하던 모습은 아니었다.

 

요즘은 내가 정체되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생각 없이 활동하고, 생각 없이 눈앞에 과제들을 해치우고 있다는. 내가 하고 있는 활동에 대해 진심으로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어떤 세상을 바라며 활동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일방적인 성장의 서사에 제동을 거는 것이 나이주의에 반대하는 것이었는데, 지금껏 나도 안이하게 시간이 흐르면, 활동 경력이 쌓이면 저절로 뭔가 멋있는 활동가(ㅋㅋ)가 될 줄 알았던 것 같다. 지금은 혼자 고민하고, 공부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